변명할 기회를 얻음(사도행전21:37-22:1)

조회 수 3396 추천 수 0 2010.06.09 00:19:09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극적인 상황에서 천부장에 의해 결박을 당함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바울은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 항상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복음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증거 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탄은 우리가 말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이 주로 역사 되는 곳은 믿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천부장은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고, 백성들이 바울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조차 막았고, 그를 죽이기 위해서 성 밖으로 끌어내는 잔인함까지 보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정죄하고 징계를 가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역사 속에 가장 잔인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유대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고정관념을 깨뜨리려 하는 바울에 대하여 지나치리만큼 가혹하고, 몰인정한 자세를 가지고 죽이려 했었습니다. 이방인인 천부장이 바울을 데리고 갈 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따라 갔지만 천부장이 손짓하여 조용히 하라 명령할 때에 그들은 조용한 자세로 바울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모습을 바로 보이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문제를 이방인이 다룬다는 사실에는 억울해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바울에 대하여는 분개하고 있습니다. 매우 소극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고, 바울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로움의 기준은 얼마나 객관적인 기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자라야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천부장은 지혜로움이 돋보이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유 없이 죽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 바울을 성안으로 데려왔고, 농성을 하듯이 바울을 죽이라고 외쳐대는 유대인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진정 시켜놓고 바울로 하여금 변명하도록 하는 천부장의 모습은 그의 지혜로움을 잘 나타내 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지혜로움 까닭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일에 대하여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유대인들이 왜 소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로움만으로는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천부장은 유대인에게나, 바울에게나, 누구에게도 지혜로운 자라고 일컬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온 백부장이 예수님께 찾아 온 것으로 '이스라엘 중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을 들은 것이 더욱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심문을 받는 중에 이성을 잃지 않고 백성에게 말하기를 청합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변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이 잘 못 되었다고 뉘우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자리하는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한 그로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환경에 지배 받지 않고, 어느 장소에서든지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는데 힘을 쓰는 모습을 가지고 살아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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