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라운 바로다, 한 말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마태복음 21:42)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내용 가운데 두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고 백성들에게는 메시야 되심을 알리심으로서 교훈 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권위주의와 교권주의에 빠져 예수님에게도 이러한 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권세의 출처는 산헤드린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는 곧 산헤드린에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무척이나 인간적 배경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본래의 역할이 말씀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에 비하면 이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존재는 자신의 권위를 존속시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부패된 상황 속에서 당시 그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함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라는 질문으로서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했습니다. 만일 하늘로서 왔다고 한다면 그들은 신성 모독 죄를 지었다고 말함으로서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공격해 올 것이고 거기에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에게서라고 한다면 교파나 기관 혹은 지파에 관한 소속을 물음으로서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하려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종교 지도자들의 도전에 대응하여 담대히 반격하셨습니다.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고 오히려 반문하심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오히려 어느 쪽으로도 대답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침례 요한은 많은 백성의 대언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한마디는 백성을 노하게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반문을 통하여 요한과의 불과분의 관계를 말씀하려 하셨고 요한의 인정이 곧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대하여 논리와 설득으로 예수님을 이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고, 또한 그들의 내면에 믿음과 신뢰가 없이 악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끌어내리고자 하는데만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정치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보였고 매사에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는 책임을 회피함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책임감 없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시지 아니한 까닭은 바로 책임감 없는 지도자와는 말할 가치가 없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완악함을 지적하시고자 하셨습니다.

* 두 아들의 비유*

이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지적하기 위한 메세지로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 생각, 행동이 각각 다를 수 있음을 엿볼 수 있고 또한 언행이 일치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참된 인간의 표본인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말은 긍정적으로 대답했으나 행동하지 아니한 둘째아들과 또한 부정적으로 대답했으나 행동에 옮긴 맏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라고 질문함으로서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셨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맏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다고 답함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회개와 순종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와 순종에 관하여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회개는 입으로만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회개는 결코 감정에 있지 아니하고 삶, 내면, 행동에 변화를 반드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를 하였다고 하면서 우리의 생활이 전혀 변화가 없다면 그는 말로만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한 둘째아들과 같이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그 열매가 변화된 생애를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순종하는 문제에 관하여 살펴봅시다.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어떠한 자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리로는 순종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행함의 능력이 전혀 없는 그들의 모순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순종하는 자가 인정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머리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내면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 세리들과 창기들이 종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누가 봐도 세상에서 볼 때 공인된 죄인들입니다. 여기서 이 죄인들을 통해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교권과 종교적 의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에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인이 권위의식 즉 교만에 있음을 전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자가 믿고 회개한다고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공인된 죄인들 즉 세리와 창기들은 항상 세상을 살면서 죄책감 혹은 죄의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까닭에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전혀 내세울수가 없는 까닭에 권위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내면이야말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바로 순수 그대로요 또한 열심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증거하는 가장 좋은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공인된 죄인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대조적인 생활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말로는 열심히 믿었으나 그 말씀을 믿고 영접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리 마태가 그랬고, 여리고의 삭개오가 그랬고,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고, 우물가의 여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향하여 믿고 영접하는 태도를 분명했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인된 죄인들의 모형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내면은 바로 이러한 생활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 포도원 농부의 비유 *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관계를 설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포도원 주인과 농부와의 관계, 포도원 주인과 종들과의 관계, 또한 농부와 종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농부는 인간들을 말하며 종들은 주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대언자 등 주님의 일군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세상은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로 완벽하게 인간들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진 조화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진 곳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포도원은 바로 세상을 의미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곳에서 각자의 노력으로 많은 실과를 거두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진정한 주인을 잊고 자신이 주인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농부들이 자신의 주인을 잊고 오히려 주인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하는 모습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이는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종들을 해치고 있는 농부들에 대하여도 계속해서 관계성 회복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계신데 멀어진 관계를 회개할 때까지 계속해서 시도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를 좀 더 구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첫째로 주인의 대적자인 농부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주인의 것을 다만 관리하는 자로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차츰 그들의 마음에 교만함이 싹트게 되면서 자신이 주인이 된 것처럼 큰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그의 서신에서 이르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바가 있는데 그들은 인간적인 욕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까닭에 주인에 의하여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는 결과를 빚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조차도 상속자이니 그를 죽이면 그 모든 재산이 자신들의 몫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여기서 농부는 인간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인간들은 생각지 아니하고 오히려 대신 보냄을 입은 많은 선지자들과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 아들 예수까지 세상에 보내어 화해하려 했지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종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는 종은 다만 주인의 심부름만을 하는 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진정한 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종은 결코 이 사회에 지도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주어진 말씀만을 증거 하는 자가 진정한 종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종은 결코 자신의 사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인의 일방적 명령에 의하여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명령을 받아 가는 곳이 죽음에 이르는 곳이라 할지라도 가야만 하는 것이 진정한 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정한 주의 종들은 세상에서 항상 희생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주의 종들의 모습 역시 예외일 수 없음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셋째로 아들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은 마지막 화해자로 왔지만 결국 농부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비유를 말씀하신 까닭은 자신이 버림받을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 속에 나오는 아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암시해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의 결과로 새 예루살렘 건설을 약속하고 계심을 말씀의 내용 속에 가르치시면서 구원자 혹은 심판자가 되심을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결국 희생을 당하지만 그 희생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시대를 섬기는 대서 비롯되고 그 권세가 영적인 데서 나옴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주인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주인은 언제나 농부들을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인이 농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종들도 보내고 그 아들까지 보냄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오직 한 가지를 위하여 희생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세상을 멸망치 아니하심은 이 세대를 사는 인간들이 결코 의로와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고 인내하심 까닭입니다. 바로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그 내면의 모습을 더욱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외형의 모습을 볼 때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내면을 계속해서 변화시키기를 촉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곧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회복하시려 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단적으로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 한가지 알아야만 할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참고 인내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중을 바로 깨달아 변화된 내면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예언한 대로 그분은 희생을 당했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는 생활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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