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8:14)

주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큽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우리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관념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생명과도 동등하게 여기심을 말씀을 통해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나 역시도 이 일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성도를 보면 경계와 미움으로 일관하게 되고 오히려 그 성도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곤 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 스스로가 잘못 되어졌음을 가르쳐 주는 가장 좋은 교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고 그를 사랑하시며 그를 잃어 버렸을 때 눈물로 찾으시고 항상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너무도 판이한 뜻일 것입니다. 인간적인 우리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영적인 모습으로 바꿔나가야 할 것입니다.

* 천국에서 큰 자 * 1-14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고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옷은 빛으로 빛나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들뜬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습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한 가지 큰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 대목을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즉 그들은 내면에 하늘의 왕국에는 이미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면서 우월성을 세상으로부터 가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의 내용 속에서는 하늘의 왕국에서 좀 더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내면성과 남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적인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생각에 일침을 가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의 문제를 질문에 답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논하시면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단순하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예수님은 또 다른 자격을 제시하심으로서 제자들에게 교훈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한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에 대한 특성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어린아이들은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배웁니다. 일반적인 성도나 사역자들은 배우는 것에 대해서 귀찮아하거나 혹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배우는 도중에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그는 즉시 그곳에서 나와 버리고 맙니다. 그 스스로가 발전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지만 그에게는 성장을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말씀에 관해서도 내가 직접 성경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면 되지 하는 안일한 태도를 가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어린아이가 할 수 없는 일임을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편견과 고집이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생각과는 반대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의 작업이 자기를 버리는 일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때로는 금식도 하고 때로는 밤을 세워 기도하면서 노력합니다. 자기가 드러나는 가장 큰 증거는 편견과 고집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 속에서 살아 있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편견이나 고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이러한 편견과 고집을 없애도록 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어린아이들은 절대로 보호가 필요하고 의지할 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자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강하고 능력 있는 자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그에게서 능력은 사라졌고 인간의 겉 사람만 더욱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절대 보호가 필요하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침에 있어서 때로는 교만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했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자신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루라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부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만을 절대 의지하고 믿는 생활을 해 나가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입니다.

넷째로 어린아이들은 그 부모에 대해서 철저히 의지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그 스스로가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합니다. 부모의 도움과 협조 없이는 단 하루도 그는 적응해 나갈 수 없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우리에게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세상에서 적응해 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라도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가 도우심이 없이 세상을 살아나간다면 사탄과의 결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 속에서 세상을 적응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적 의지, 이것은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소중한 진리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해서 먼저 자격을 논하셨고 4절의 말씀에서 큰 자에 대한 답을 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겸손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의 도리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종이 되어 줄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천국에서 큰 자는 바로 종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종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누가 크냐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대단히 위험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제자들이 세상적 가치관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고 권위를 내세우고자 하는 마음, 배우기를 싫어하고 목이 곧고, 경직되고, 경쟁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표현하고 계십니다. 5절에 보면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가져야할 자세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를 품어주고 세리와 창기를 섬기시고 도우신 것처럼 복음 전파의 대상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림하려고 하는 자세를 회피하고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생활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내면성을 가져야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할 수 있듯이 우리의 모습을 좀 더 겸손함으로 가꾸어서 생활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자격과 큰 자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실족하는 문제를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실족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목자에게 가장 큰 영향력이 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일반적인 살인보다 영적인 살인이 더욱 무서움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는 원초적으로 사랑이 없는 무관심 속에서 시작되고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의 나쁜 영향 때문에 대부분 실족하게 됩니다. 또한 성도들의 세상과 교회를 동시에 섬기는 이중 생활, 또한 율법적인 판단과 정죄를 통해 상대방을 저주함으로 생기는 실족은 흔히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실족시켜서는 안됨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자신이 실족 당해서도 안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몸 한 부위에서 실족케 하는 원인이 발생이 된다면 그 부분을 찍거나 내버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면서 영적 생명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성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또한 이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범죄케 하는 유혹에 대한 대처 방법, 죄에 대한 경각심, 회개 생활의 중요성 등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절대적 가치성을 인정해 주고 성령을 통한 영적 승리의 생활이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있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영혼에 대한 중요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다른 한 편으로 물량주의에 대한 경각심 일 수도 있습니다. 14절에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여기서의 이 작은 자는 연약한 심령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 안에서 믿음이 없는 자를 가볍게 여기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자보다 믿음이 없는 자에 대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장성한 자는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이나 청소년 시기 쯤 되면 부모들은 자연적으로 근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장성한 성도는 하나님이 보실 때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계시지만 믿음이 연약한 심령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끝없는 관심을 보이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한 마리의 양을 통한 소자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고 한 영혼의 목자로서의 역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예수님의 간절한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마리의 양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 용서하는 사람 * 15-35

15절을 보면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하거든 가서 너와 그가 따로 있을 때에 그의 허물을 일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 권면에 있어서 일대일로 권고하는 생활이 있어야 함을 볼 수가 있고 한 사람의 영혼을 잘 키워야 다른 사람도 잘 키울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잇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한 중요성은 이미 가르친 바가 있고 그 한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목자의 끝없는 상한 심령의 마음을 가지고서 한 사람을 살리고자 노력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일대일의 권고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는데 그 첫번째로는 개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일대 일로 권고해야 하고 둘째로는 영적으로 감싸기 위해서 일대일의 권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한 성도가 실수를 했을 경우 성도들 앞에 무안을 주고 내어쫓는 경우가 종 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주님의 말씀과는 매우 대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조용하게 모든 일을 해결해 나가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개인적인 권고에 있어서 효과가 없을 경우 차선의 책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말마다 증참케 하는 것과 최종적으로 교회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죄의 의미가 아닌 합심해서 돕고 회개를 촉구하는 권면의 일부일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교회의 지체로서 돕는다는 의미가 있고 교회에 말함은 교회의 순수 역사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최종적인 단안으로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이는 치리하는 방법으로서 죄인시 취급하고 출교시킴으로서 자신을 깨닫게 하기 위한 행정적인 처분을 단행한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리의 방법으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 된다면 주님의 뜻과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에 있어서 합심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합심 기도를 함으로서 죄인들을 도울 수 있고 기도의 권위와 힘이 나올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교회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면 영적인 권위가 주어질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권위와 동등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권위를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용서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통례로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을 말함으로서 랍비들보다 낫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계가 없는 용서를 말씀하심으로서 상대방이 회개할 때에는 언제나 용서할 것을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로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금액은 숫자로 따진다면 육천억불 정도의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저히 값을 치룰 수 없는 금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모든 인간들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으로서 여기서의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영생을 말하고, 이 영생은 도저히 값으로는 치를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발견입니다. 자기 자신이 은혜를 입고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백 데나리온을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모습을 통해서 자기 발견은 더욱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료(개역성경에서는 동관)라고 하는 것은 함께 종 된 사람을 의미하는 데 그가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의에 기초해서 남을 정죄 하는 일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금액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듯이 우리의 용서의 한계는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의 내면 역시 용서받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18장의 내용을 통해서 천국에서 진정으로 큰 자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용서에 대한 진정한 진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어느 부분보다도 사역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더욱 신실한 모습으로 주님의 일들을 생각하고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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