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멀리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죽음을 준비한 기도로서 이미 그의 때가 가까워 옴을 아시고 밤을 세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심에 있어서도 가장 믿었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에 의하여 팔리움을 당할 것을 아시고 더욱 마음을 아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데 살펴보도록 합니다.

*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 31-4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을 준비하시기 위해서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던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마음은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대부분은 제자 양성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음 아파 하셨던 것은 결국 제자들로부터 버림 받으실 것을 아신 데 있을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혼자 받으시려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의 상반된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 주님의 모든 것을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이기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에 반하여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뜻을 읽지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봐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를 제자들을 위하여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 의하여 버림받으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배반당하실 것을 아시고 또한 자신이 제자에 의하여 죽을 것까지 아셨지만, 결코 원망치 않고 끝까지 말씀을 붙잡고 교훈하시기를 말씀대로 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없는 그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되는 만남을 이야기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하심이 제자들의 아름다움에서 본 것이 아니라 죄인 된 그 모습에서 배반하고 있는 그 모습에서 찾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 된 우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둘째로 베드로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언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함으로서 스스로가 장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고 자신의 의지를 지나칠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말씀으로 받아 들일수도 있으나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전혀 인정치 않으려는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 대하여 베드로보다 더욱 잘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거부했다는 것은 혈기에서 나온 즉 말씀을 영접지 아니하려는 자세로부터 비롯한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자라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내적 싸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기도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은 평소에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 자신의 뜻과 하나님과의 싸움을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기 때문에 자신의 뜻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은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앞에 두고 오히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다른 뜻을 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기도 가운데 혹은 믿음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 뜻을 하나님 앞에 관철하려는 기도의 모습을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자신이 연약함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모습을 하나님께 보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 예수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베드로에게조차 통사정을 하고 계십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혼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님을 가르치시고 함께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가르치시고자 하셨습니다.

(4)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는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도전적이셨습니다. 기도하는 모습 역시 도전적인 자세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철저한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고 의심의 기도가 아닌 사랑의 확신을 가지고서 신뢰와 친근감 있는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과 내 뜻이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통하여 순종할 수 있는 또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기도가 있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깨어 있지 않은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깨어 있는 삶 속에서 있습니다. 육신적인 연약함, 또는 무지가 잠을 자는 원인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위기감 속에서 살아갈 때에 비로소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예수님께서 요구한 한 가지 사명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밤을 세워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단 한 가지는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을 맡아 시킨 것도 아니었고 함께 데리고 가서 다만 깨어있어 기도하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깨어 있는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깨어 있습니까?

다섯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반복하시면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가 진전되어져 가면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어지기를 구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이미 고난을 각오하고 결단이 내려진 기도였던 것입니다. 즉 기도를 통하여 내적 승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인간은 본래 불순종의 체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순종을 배우시고(히 5:), 이 내적인 승리를 통하여 적극적 자세로 나아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기도로 극복하고 계신 예수님, 졸고 있는 제자 이 둘은 결국 고난을 당하게 되자 예수님은 담대히 임하게 되었고 제자들은 앞 다투어 도망갔던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삶은 우리의 생활 내면에서 항상 있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 예수님을 아는 성도 * 마태복음 26:47-75

예수님은 자신이 유다에 의해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유다가 다가와서 입을 맞추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행동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왔을 때까지도 제자들은 주님의 모습에 대하여 별로 큰 반응이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무리들에 의하여 잡히는 순간 베드로는 검을 빼들고 대제사장의 종을 검으로 쳐서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때까지도 베드로는 주님의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무조건 예수님을 변호하려고 하는 모습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검을 거두실 것을 말씀하시고 무리들에 의하여 끌려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열 두 영 더 되는 천군 천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혀 이용하시지 아니하시고 말없이 순종하는 양처럼 끌려 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로 구분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또한 숨어서 지켜보는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 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끌려가는 일에 대하여 면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더 큰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끌려 가셨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지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일을 반드시 선행했을 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십자가를 지는 일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에만 의지하는 생활이 있어야 했습니다. 어느 누구건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 말씀에 힘이 없다면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의 해결은 자신의 일방적 생각에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거한 의지적인 순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재판장에 앉으신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모습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라고 물었을 때에만이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 대답의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을 통해서 십자가를 질 것을 알고 계셨지만 여기서 주님은 그리스도의 왕권, 심판의 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즉 그 자리에서 왕 되심을 선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중죄인으로 몰아 재판하려는 대제사장들의 모습과 만 왕의 왕 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 되기를 거부하지 아니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의 삶은 누구를 더욱 닮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만 할 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한 모습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기도하지 못한 베드로의 모습의 비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실패하는 인생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부인했던 것은 그의 내면이 공포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포감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내면이 공포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포감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기도하지 않는 가운데서 생겨나는 것이고 또한 공포감은 많은 죄를 유발해 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부인하고 난 후 닭이 울 때에 통곡함으로 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놀라운 계기를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몇 가지 위대한 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그는 예수님 곁에서 도망했을 때에도 완전한 도피가 아닌 어딘가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 때 즉 절망적인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어도 그는 먼 발치에서 나마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는 자기 회개가 있다는 데 찾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회개치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 하여 이제는 소용없다고 낙심하고 돌아갔다면 오늘의 말씀 속에 나타난 베드로는 전혀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습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낙심하고 실망하며 완전히 돌아선다면 그는 실패한 인생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회개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거나 도피해 버린다면 그 역시 불행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는 모습, 자신의 권세를 조금도 놓치지 아니하시는 권위 있는 모습, 그와 더불어 나타난 베드로의 회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한 과정이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완성은 십자가에 있었듯이 오늘 우리 성도의 완성은 고난과 더불어 계속 되어지는 회개에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며 믿음의 모습들을 승리롭게 해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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