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 들린 아이를 고치심(마17:14-20)

조회 수 2609 추천 수 0 2010.11.20 09:45:49

예수님의 기적(34) 마귀 들린 아이를 고치심(마17:14-20, 막9:14-29, 눅9:37-42)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어떤 사람이 그분께 와서 그분께 무릎을 꿇으며 이르되, [주]여, 내 아들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그가 미친 증세로 심히 시달리고 자주 불 속에 쓰러지며 종종 물 속에 빠지나이다. 내가 그를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그들이 그를 고치지 못하더이다, 하매 이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언제까지 너희를 용납하리요? 그를 이리로 내게 데려오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마귀를 꾸짖으시니 그가 그에게서 떠나가고 아이가 바로 그 시각부터 나으니라.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우리는 그를 내쫓지 못하였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로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을진대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 너머로 옮겨 가라, 하면 그것이 옮겨 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마17:14~21)

 

어떤 사람이 그의 외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는 아이가 마귀에 들려 아무 데나 데려가서 쥐어뜯으면 그가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또 몸이 파리해진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고쳐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예수님께 왔을 때에도 그 영이 그를 쥐어뜯으므로 그가 땅에 쓰러져 뒹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마귀에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시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믿을 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고 답하십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지 아니함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했을 때 그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막9:14~27). 이 일이 있은 후 제자들이 왜 자신들에게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종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느니라”(막9:27)고 대답을 하심으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먼저 제자들은 왜 이 아이를 고칠 수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충분히 아이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고치지 못했던 것은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고치지 못했던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을진대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 너머로 옮겨 가라, 하면 그것이 옮겨 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마17:20)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믿음에 관하여는 많은 논쟁이 있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념과 믿음을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 사상을 추종하는 자들은 “할 수 있다” “혹은 "하면 된다” 최근에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기 최면과 같은 것들을 신앙에 접목하려 시도합니다. 실제로 근세기에 들어서 그들의 시도는 성공 했고, 긍정적 사고방식은 이미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굳이 이것을 분류하자면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념은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면 주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망한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념에 가까운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믿음이었다면 이미 마음에 품는 순간 응답이 되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망하는 것은 있지만 실제로 그 뜻을 이루고 사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겨자씨만한 믿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렸지만 그것은 예수님께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아이를 고쳐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스스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면 충분히 기적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그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셨고,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살 수 있었던 그들 앞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을 미문이라는 성전 앞에서 만납니다. 이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며 그를 고쳐주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고 말하자 그는 걷고, 심지어 뛰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 일이 결코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믿음으로 고쳐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가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막9:23)는 구절을 말하며 반박하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거짓 선생들은 이 가르침을 마치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거짓입니다. 우리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막9:29)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바티칸 사본을 기초로 하는 모든 성경이 “금식”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왜 그들은 금식이라는 단어를 삭제했을까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에서 매우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많은 곳에서 금식에 관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회개나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이 필요할 때 있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금식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금식보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금욕의 차원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금식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대부분의 성경들은 금식을 삭제하고, 교회는 더 이상 금식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승리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스스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주님의 교회를 흉내 내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모습으로 있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며,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가장하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을 스스로 하려하고, 더 이상 주님이 필요 없는 상태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때로는 금식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십시오. 그러한 삶은 우리를 더욱 큰 믿음으로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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