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명을 먹이심

조회 수 1770 추천 수 0 2010.06.05 18:42:10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제 그들이 사흘 동안 나와 함께 있는데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도다.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까 염려가 되므로 내가 그들을 굶겨서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광야의 어디에서 이 큰 무리를 배부르게 할 만큼 많은 빵을 구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무리에게 명령하사 땅에 앉게 하시며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취하사 감사드리시고 그것들을 떼어 자기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그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나누어 준 음식 중에서 남은 것을 일곱 바구니 가득 거두었더라. 먹은 자들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 사천 명이었더라. 그분께서 무리를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막달라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 (마15:32~39)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에 앞서서 이미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던 장면에서는 제자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의도로 무리들에게 어떻게 먹일 것인지를 물었지만 이제는 무리들이 길에서 쓰러질 것을 염려하셔서 제자들에게 빵이 얼마나 있는지를 묻습니다. 무리들은 사흘 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느라 매우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보내실 수도 있었지만 굶겨서 보내지 않으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무리들에게 있었습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은 예수님의 본성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사람들의 필요들을 채워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병든 자에게는 치료를, 굶주린 자들에게는 빵을 주심으로서 사람들의 연약함을 채워주십니다. 이것은 종교와 복음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들에게 무엇인가를 드림으로서 만족합니다. 그들의 신들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에 근거합니다. 종교가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한다면 복음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돌아가심으로서 죄를 사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종교가 의에 대한 댓가로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라면 복음은 오직 은혜로만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면 복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무리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보기 위해서 모여 있고, 스스로 먹을 음식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으며, 먹을 양식을 필요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으며,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기 위해서 다시 양식을 준비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시는 모습을 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즉시로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다는 사실을 고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전에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제자들은 계산을 하고 먹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들의 가진 것을 가지고 와서 아무 말 없이 예수님께서 행하실 기적을 목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하여 무리들을 먹이실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결코 의심하지 않을 만큼 성장해 있었습니다.

한 번의 체험은 제자들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습니다. 시행착오가 그들을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실수를 하게 되면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하고나면 깊은 좌절과 침체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은 결코 완전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얻게 되는 순간 자신이 완전해졌을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들은 결코 완전한 상태가 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바로 말하고 걷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서 시행착오의 과정 없이 거룩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실패를 통한 시련이 왔을 때, 그는 자신을 더욱 주님께 의지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이 기적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예수님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오천면을 먹이실 때에 제자들이 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고, 제자들은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통한 기적을 보기 원한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그대로 가져 오면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물질이나 재능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가진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종교는 언제나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정성과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동일하게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이는 주님이시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기 원한다면 주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어 놓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는 또 다시 남은 것들을 거두어 일곱 광주리를 남기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모두 먹이신 후에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는 점입니다. 이미 사흘이나 그들과 같이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리들은 여전히 기적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이 기적을 보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이실 기적은 병을 고치고, 빵을 먹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 외에는 보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 기적을 기다리며,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강제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 남자만 사천 명이나 되는 무리는 결코 적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전에 오천이었지만 사흘 동안 계속해서 따라다니면서 지금은 사천 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기적들을 충분히 목격했고, 메시야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들을 염려하셨습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목적은 분명히 보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에게 보였던 기적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서 소문을 더욱 퍼져가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더욱 많아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한 곳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보다는 더욱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는 자신의 사역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그들을 흩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기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긍휼이 많은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제자들을 효과적으로 훈련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적은 우리 자신에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온전해지려고 한다면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온전함 역시 주님의 도우심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편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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