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

조회 수 4174 추천 수 0 2010.06.05 21:06:41

기드온(사사기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은 농부 출신의 사사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한 히브리서 11장에서도 믿음의 위대한 선배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겸손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또한 가문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가장 가난하고 작은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6:15).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을 때에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음을 고백했던 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강권하여 주의 천사를 통해 재물을 불사르고(6:21), 기적들을 보이심으로서 그들 사용하셨습니다(6:36-40). 마치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할 때에 기적을 보이신 것과 매우 비슷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우리의 능력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이 부르심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겸손함 때문입니다. 이처럼 겸손한 자를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고,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하나님의 일들이 영향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세대를 걸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비켜갈 수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입기 원한다면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는 삶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드온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에 의해 수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수난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6:1).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따라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이 분노의 결과가 미디안으로부터 수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 수난은 단순히 그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곳에서 칠년 된 어린 수소를 희생물로 드립니다(6:25-27). 이 일로 인하여 도시의 사람들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더욱이 이 일이 기드온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죽여야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므낫세 지파의 사람들을 모아서 미디안과 대적하여 싸우도록 만드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6:33-35). 우상은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가 되어 미디안과 싸울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영적 전쟁을 치루는데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드온의 모습에서 보듯이 우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상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물질과 명예, 권세와 지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우상은 바로 자아, 즉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영적인 삶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의 실패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자신을 깨뜨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제 기드온은 전쟁을 준비합니다. 기드온을 따라 모여든 군사들은 32,000명이었습니다. 이 숫자는 적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지만 하나님은 너무 많다고 하시며 두려워 떠는 자 22,000명을 돌려보내십니다. 그러나 남은 수도 많다고 말씀하시며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 300명을 제외한 혀로 물을 핥는 자 9,700명을 돌려 보내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300명으로 전쟁을 준비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쟁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합당치 못한 자의 하나로 두려워 떠는 자를 들 수 있습니다. 대적을 두려워하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사단을 두려워한다면 결코 영적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 전쟁에 합당치 않은 자의 모습으로는 강을 핥는 자의 모습으로 경계하는 자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는 적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항상 눈과 귀를 열어놓고 경계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만일 방심하고, 경계를 하지 않는다면 사단은 즉시 그를 삼키려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깨어있어야만 합니다(벧전5:8). 우리가 300명의 군사를 준비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깨달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싸움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혹 대등한 상태에서 싸워서 승리하게 되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싸움을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하나님은 적은 수를 가지고 전쟁을 하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우려는 언제나 사실로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승리의 삶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영적 싸움에 필요한 것은 숫적인 우세가 아니라 싸움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알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혼란한 시대 속에서 적은 무리된 우리들은 언제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기드온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를 연상케 합니다.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300명의 군사로 대적하면서 가진 무기도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전쟁을 이해하려 한다면 마치 어린아이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분명히 있었던 사건이며, 하나님은 이 싸움을 승리하게 하셨고, 이 전쟁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을 제시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싸움에서 항아리 안에 감추어진 횃불과 나팔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횃불과 나팔이 항아리 속에 있는 동안에는 그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아리가 깨어지는 순간 횃불과 나팔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적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이 전쟁은 이미 주님께서 승리를 보장해 놓으신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을 하시도록 한 이유는 주님께서 싸움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싸움의 승리를 위해 가져야 하는 자세는 무엇일까요?

 

항아리가 부서졌을 때 횃불과 나팔이 드러났고 대적들이 놀라 도망하게 된 것처럼 우리의 자아가 깨어졌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이 드러남으로서 사단의 세력이 놀라 도망하는 결과가 있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은 그 빛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또한 승리의 소식은 결코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는 자아가 깨지는데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아직도 자아가 깨지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군사가 항아리를 깨고 나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리는 자아를 깨뜨리고 사단의 권세와 싸워 이기는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줄 것을 요청합니다. 즉 그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친히 다스리실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전쟁을 승리하게 만들었고, 나약하고 볼품없는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지도자들은 명예를 얻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물질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을 낮추고 오직 주님을 높이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겸손한 지도자들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드온에게도 문제가 발생이 되었습니다. 그가 미디안 족속에게서 빼앗은 금귀고리로 에봇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에봇은 일종의 부적과 같은 것으로 좋은 의도에서 제작했지만 결국 그의 집과 이스라엘이 올무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8:27) 그의 헛된 열심히 결국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음란해 지고 부패해 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나 승리의 뒤에는 이처럼 죄의 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승리 뒤에는 밧세바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고, 솔로몬의 승리 뒤에는 많은 이방 여인과 부귀, 명예가 기다리고 있었고, 모세의 승리 뒤에는 혈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수 없이 회개하는 날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구원받은 승리감에 도취하지 말고 받은 구원을 감사하며 주님 오실 때까지 경건의 삶을 누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드온이 죽은 이후로 이스라엘은 또 다시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빌미는 이미 기드온이 미디안족으로부터 빼앗은 금귀고리로 에봇을 만들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지도자의 작은 실수 하나가 그의 죽음과 더불어 곧 바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믿음의 본을 보이고 그를 기억하는 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지도자의 신중함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중함을 겸비한 지도자는 많지 않습니다. 물질과 지식을 무기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지만 결국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이유는 신중하지 못한 처신 때문입니다. 한 교회 지도자의 몰락은 곧 교회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그 까닭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경건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도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고전 9:27). 그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신중하지 못한 처사들, 즉 비 진리와의 적당한 타협과 반 복음적인 문화의 수용 등은 지도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중하지 못한 지도자의 자세는 결국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합니다. 한 교회의 지도자에게도 이러한 신중함은 요구됩니다. 오직 말씀으로 분별하고 성령 안에서 생활함으로서 누룩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지도자의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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