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다말(창38:1-30)

조회 수 4351 추천 수 0 2010.06.06 22:52:23

석 달쯤 뒤에 어떤 이가 유다에게 고하여 이르되, 네 며느리 다말이 창녀 짓을 행하였고, 보라, 또 행음하여 아이도 배었느니라, 하니 유다가 이르되, 그녀를 끌어내어 불태우라, 하매 그녀가 끌려 나갈 때에 자기 시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이 물건들의 임자로 말미암아 내가 아이를 배었나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원하건대 이 도장과 팔찌와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식별해 주소서, 하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녀가 나보다 의롭도다. 이는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38:24-26)

 

우리는 성경 안에서 근친상간(近親相姦)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롯이 소돔 성을 벗어난 후에 소알성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굴에서 그의 두 딸과 더불어 동침하여 모압과 벤암미(암몬)를 낳은 것입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근친상간의 사건을 소개한다면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이었던 빌하와 더불어 함께 누운 기록입니다(창35:22). 결국 이일로 인하여 르우벤은 그가 능력 있고 탁월한 존재임에 대하여 인정은 받았지만 결국 물과 같이 불안정하여 탁월하지 못한 존재가 될 것에 대하여 그의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예언의 말을 듣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창49:3-4). 성경 안에서 근친상간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친상간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에 불륜의 관계가 벌어진 유다와 다말과의 관계입니다. 특별히 이들의 관계가 관심을 끄는 것은 신약성경의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하여 설명되어질 때,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마1:3). 이 사건은 분명히 특별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분명히 옳지 못한 것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의 실수

 

그때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히라라는 이름의 어떤 아둘람 사람에게로 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수아라는 이름의 어떤 가나안 족속의 딸을 보고 그녀를 취하여 그녀에게로 들어가니(38:1-2)

 

우리는 여기에서 유다가 아내를 얻는 과정에서 그의 행동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이러한 행동을 소상히 기록한 것은 반드시 그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행동에서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까?

 

1)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첫 번째 실수는 형제들로부터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스스로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능력 있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지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범위를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자신의 전 생애를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어떠한 범위를 떠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부터 떠나는 상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과 범죄 함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앙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유다의 행동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범위를 떠나 스스로 행동을 하게 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떠나는 모습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는 것(고후11:3),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갈1:6), 믿음에서 떠나는 것(딤전4:1), 돈을 탐하다가 믿음에서 떠나는 것(딤전6:10), 진리를 떠나는 것(약5:19) 등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잘 못된 모습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생애는 그들이 유다와 같이 약속된 유업을 받을 수 있겠지만 부끄럽고, 그가 받을 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준 채 인생을 마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주님의 교회이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교회의 지체가 되어서 성도들과 더불어 함께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몸 가운데 만일 스스로 움직이고자 한다면 그는 곳 장애자입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몸들은 서로 질서 있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주님의 교회를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2) 가나안 족속의 여인을 취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가나안 족속의 여인을 택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함에 있어서 그의 종을 시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 가운데 아내를 얻지 않고 그의 고향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창24:3-4). 이삭 역시 야곱을 불러 축복한 후에 가나안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습니다(창28:1). 이러한 가르침은 그의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결단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나안 족속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연히 가나안 족속과 분리되지 못한 채 서로 섞여져 살아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원주민이었음으로 세월이 흐르면 본토인에 대한 논란으로 인하여 장차 이스라엘 민족은 정착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멸해야하는 대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결혼을 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가나안 여인은 아내로 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역행하고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와의 관계를 통하여 얻을 후손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행동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분리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기에 좋다고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은 장차 멸망당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매들은 철저히 주님의 말씀의 씨로부터 시작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외에 어떠한 것도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풍성해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면 분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유다는 이 일에 실패를 함으로서 옳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형제 중 하나가 먼저 죽었을 때 그 아내 된 자는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가지 말고 남편의 형제 된 자가 남편의 의무를 행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신25:5). 물론 이 말씀은 유다가 살던 시대가 아닌 모세의 때에 율법으로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다가 자신의 맏아들 엘이 죽고 둘째 아들이었던 오난에게 주었던 사실을 보아서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이 아직 장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을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막상 막내였던 셀라가 장성하자 자신의 막내아들마저 죽을 것을 염려하여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유다는 자신의 씨를 보호하기 위해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지내라, 하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셀라도 자기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다말이 가서 자기 아버지 집에 거하니라.(38:11)

 

만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추진하다가 낭패를 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유다는 이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큰 낭패를 당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환난을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두려워 피하게 된다면 더욱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야고보와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다고 해서 복음이 멈추었더라면 오늘날 복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더 이상 복음은 능력을 보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더욱 왕성하게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알았고,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전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말의 불행

 

유다 못지않게 다말도 불행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비록 창녀로 변장을 하고 유다를 유혹했던 여인이었지만 오죽하면 그녀가 그러한 결단을 해야만 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결혼하고, 바로 남편을 잃었고, 남편의 동생이었던 오난으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시아버지였던 유다로부터도 경계의 대상이 되는 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그녀의 집안에서 사랑받지도 못하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이러한 불행도 그녀가 자초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1) 경건치 못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유다의 맏아들 엘이 주의 눈앞에 사악하므로 주께서 그를 죽이시니(38:7)

 

다말의 남편을 누가 죽였습니까?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가 죽은 이유는 주님의 눈앞에서 사악한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말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처음부터 주님 앞에 사악한 자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잘 못된 결혼을 한 것입니다. 다말의 불행은 결혼과 함께 이미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신중하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결혼이야말로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결혼 상대를 결정합니다. 학력, 재력, 체력, 성격 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왜 유다의 맏아들, 즉 다말의 남편이 죽었습니까? 그는 경건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외모가 뛰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 중 가장 촉망받았던 유다(대상5:1-2)의 맏아들이라는 점이 더욱 매력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서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악했다고 한 점을 보아서 매우 개성이 있었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혼과 동시에 죽음을 맛보아야만 했고, 다말은 졸지에 과부가 되어 가장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이 불행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선택 기준을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경건한 삶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하다는 점을 인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랑 받지 못했습니다.

 

유다의 집으로 시집을 온 이상 그녀는 그곳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죽은 이후로 그녀는 이제 남편의 동생이었던 오난의 아내가 되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가 정작 형수와 같이 잠자리에 들면서도 그의 씨는 그녀에게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38:9). 지금 다말은 한 가정의 맏며느리이지만 마치 창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오난이 죽음을 당하지만(38:10), 다말의 마음은 여전히 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오난이 형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알았다면 그렇게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어찌된 것인지 집안에서 노리개와 같은 존재이며, 또한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결혼은 때로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고통가운데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을 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가정이 아닌 곳으로 시집을 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저마다 괴로워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켜보겠다고 힘을 쓰지만 외면을 당할 뿐입니다. 제아무리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한낮 꿈일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죄와 적절한 타협을 하면 행복해 질 것만 같지만 세상은 결코 우리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욱 많은 타협을 요구할 것이고, 결국에는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3) 결국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 의해서 쫓겨납니다. 그가 자신의 막내아들이 죽을 것을 염려해서 결국 며느리를 쫓아낸 것입니다(38:11). 물론 그녀가 쫓겨난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레22:13). 하지만 그녀는 지금 참담한 심정으로 자신의 친정집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과연 그의 친정 부모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자신으로 인해 시댁에서 두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며, 막내가 클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말을 부모에게 말하는 심정은 또 어떻습니까? 그녀는 지금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녀는 재혼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누구에게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녀는 어디를 가나 외면을 당할 것이 분명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녀는 앞으로 더욱 불행해 질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어서 위로할 이도 없습니다. 이제 그녀도 오직 주님 밖에는 위로할 분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은혜가 임할 수 있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유다와 다말의 만남

 

우리는 여기서 실패한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좌절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상태가 지금 어떻습니까?

 

1) 유다는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졌습니다.

 

어찌 보면 유다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두 아들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아내마저 죽었습니다. 그가 비록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지만 오직 한 아내만을 두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도 세상에 없습니다. 그는 매우 외롭습니다. 그는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고, 이 슬픔은 사라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친구와 함께 딤낫이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은 그의 양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양털을 깎는 자들이 함께 있었고, 유다는 그곳에서 양털을 깎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외로움을 털어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한 창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함께 동침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제안대로 도장과 팔찌와 지팡이를 담보로 하고 후에 염소 새끼를 보내주기로 약속을 한 후 그녀와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 결국 이일로 인하여 그녀는 아이를 수태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유다는 더욱 큰 아픔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녀로 변장한 여인이 바로 그의 며느리였던 다말이었기 때문입니다.

 

2) 다말은 반드시 씨를 얻고자 했습니다.

 

유다에 비해 다말은 더욱 큰 아픔을 겪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특히 유다 자손의 씨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여인으로 보여 집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이후에 남편의 동생이었던 오난과도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관행이 그러했고, 또한 그녀 역시 씨를 얻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서슴없이 행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난이 죽은 후에도 아직 어린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는 정성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유다의 자손의 대를 잇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그녀 자신이 스스로 창녀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게 됩니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유다의 씨를 낳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남편이었겠지만 그는 남편이 죽은 이후로 상대에 관계없이 유다의 씨를 낳고자 했고, 결국에는 직접 유다와 접촉하여 그의 씨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결국 목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3) 불륜으로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유다와 다말의 관계는 분명히 정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다말의 수태 사실을 알고 유다가 외면했다는 사실(38:26)을 보면 그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오히려 자신이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아들 셀라를 주지 아니함으로 생긴 결과였다는 점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다말이 유혹을 했고, 모든 것이 다말에 의해 진행되어진 것이지만 오히려 다말이 의롭다고 고백하는 유다의 모습은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의 씨를 사모했던 다말의 모습은 오히려 칭찬을 받을 만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 비록 상식을 뛰어넘기는 했지만 그의 사모함은 오히려 의롭다고 인정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가 주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회개할 수 있습니까? 그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고, 그것을 굳게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상식 밖의 일을 할 필요는 없지만 때로는 어려운 결단이 요구될 때에 담대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말의 증거품

 

유다가 일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하매 그녀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팔찌와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소서, 하니 그가 담보물을 그녀에게 주고 그녀에게로 들어가매 그녀가 유다로 말미암아 수태하였더라.(38:18)

 

우리가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보면서 매우 흥미롭게 생각되는 부분은 유다가 다말에게 세 가지의 담보물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성경 안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는 물건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장차 그리스도인들의 삶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1) 도장

 

도장은 우리가 보통 성경 안에서 인(印)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대신하여 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장을 한 번 잘못 사용하게 되면 커다란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도장을 맡긴 것은 곧 그 자신을 맡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증거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느니라.(엡1:13)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4:30)

 

위의 두 구절을 보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다말이 죽을 위기에서 증거품으로 내놓은 도장이 오히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듯이 우리 또한 죄인의 신분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인치심을 받음으로서 오히려 의인의 신분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2) 팔찌

 

팔찌는 우리의 생각대로 장식품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결혼을 위한 예물로 쓰여 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었음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그의 종을 보냈을 때, 종이 리브가에게 준 예물가운데 팔찌가 있었다는 사실(창24:47)을 보면 그것이 관행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가 어떻게 이 팔찌를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아내의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 남자들도 팔찌를 하고 다녔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녀에게 팔찌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유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말이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장차 혼인잔치가 있게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계19:7,9). 누구와 혼인잔치를 한단 말입니까? 물론 정혼한 자들과 혼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과 정혼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비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엡5:32).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 지체가 되어 있다면 내가 바로 혼인잔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 주어진 약속입니다. 이것은 팔찌가 주는 또 다른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지팡이

 

지팡이는 능력과 관련하여 쓰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출7:2), 다윗의 지팡이(삼상17:40), 엘리야의 지팡이(왕하4:29)등은 모두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낼 때에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지팡이를 다말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말에게 있어서 놀라운 능력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신분이었던 그녀가 당당하게 아들들을 낳고, 또한 예수님의 족보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팡이는 어떠한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고, 상속을 얻게 될 것이며, 장차 왕이 될 자로서 살아갈 것에 대하여 약속을 받았으므로, 그가 능력 있는 생애를 사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손에 능력의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까? 그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의 병을 고치고, 마귀가 쫓겨나며, 사람들의 눈에 볼 때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능력 있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주님께도 돌이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지팡이(능력)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욱 확실한 보상을 약속해 줄 것입니다.

 

유다와 다말이 주는 교훈

 

이들은 분명히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있어서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다는 다말에 대하여 의롭다고 말하고 있고, 신약성경의 맨 처음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란히 기록되기도 하였습니다. 왜 그들의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먼저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들의 죄에 대하여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그것이 큰 죄이든 작은 죄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고, 결국 그들은 모두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 까닭에 유다와 다말에 대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언급을 따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짊어지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유다와 다말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을 했지만 그들은 분명히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와 다말의 죄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주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의롭다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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