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스러운 청지기(창41:39-43)

조회 수 3376 추천 수 0 2010.06.06 22:51:25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여 주셨으니 너와 같이 사려 깊고 지혜로운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릴지니라. 내 모든 백성이 네 말에 따라 치리를 받으리니 나는 왕좌에서만 너보다 높으리라, 하고 파라오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자, 내가 너를 세워 온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노라, 하며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주고 그에게 고운 아마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자기가 소유한 둘째 병거에 그를 타게 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무릎을 꿇고 절하라, 하더라. 파라오가 요셉을 온 이집트 땅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았더라.(창41:39-43)

 

청지기에 대한 바른 사고와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청지기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부자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가난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의 소유는 결국 다른 이들에게 넘어갈 것이고, 또한 가난한 이들이라도 영원히 가난하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떠한 존재들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머물면서 자신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작은 소유들을 맡고 있는 청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누가 세상의 주인인가?

 

소유에 대한 세상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자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노력하여 벌여 들인 사람의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세상의 부가 모든 사람들 즉 사회의 소유라고 가르치는데, 모든 사람이 그것을 관리할 수 없으므로 국가가 그 일을 하며 공정하게 분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철학을 지닌 서방 세계 사람들은 집을 사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 철학을 지닌 공산 국가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철학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점을 둘 다 배격합니다.

 

성경은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셨습니다(창1:1).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넘기셨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아닌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며(창14:22), 통치하시고 계십니다(계1:5). 이 세상에서는 그분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이 세상을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들에게 모든 것들을 맡기셨습니다(창1:27-28). 그들은 모든 것을 다스렸고, 그 안에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범죄 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사탄의 권세 아래로 넘겨주었습니다. 사탄의 일시적인 지배 아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다스려야 할 자리를 빼앗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값을 지불하심으로서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막10:45). 누구든지 그분을 믿지만 하면 그분으로부터 소유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이 땅의 것들을 우리의 소유로 삼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장차 불 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땅에 대 환난이 있은 후 천년 왕국 시대에 보상으로 이 땅을 통치하도록 할 것이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게 될 때에(계21:1) 믿는 자들로 하여금 상속으로 땅을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롬14:8). 우리가 주님의 소유임을 보다 분명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유지시키고 계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그분이 처음 만드신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지금도 세상을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주님의 인내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벧후3:9). 이것은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2.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에게 청지기로서 그분의 가지신 것들을 맡길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잡아 미디안 족속의 상인들에게 팔아 버립니다. 이집트로 끌려 간 요셉은 이집트 장군 보디발의 집으로 팔렸지만 그의 집에서 성실함을 인정받고 그 집의 청지기가 됩니다. 그러나 보디발 아내의 농락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간수장의 인정을 받아 그의 청지기가 됩니다. 어느 날 다른 죄수, 즉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 줄 기회가 오는데, 그의 해몽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꿈까지 해몽하게 되고 그의 청지기가 됩니다.

 

어떻게 그가 한 나라의 재산을 모두 관리할 수 있는 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청지기로서 자신의 일을 훌륭하게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자리에서 청지기의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장차 많은 것들을 관리할 수 있는 청지기로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1) 작은 일들에 대하여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겨 온 자에게 말하기를 "잘하였도다, 착한 종아, 네가 매우 작은 일에 신실하였은즉 열 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차지하라."(눅19:17)고 말씀하신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작은 일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사실상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작은 일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결국 그 결과를 보시고 놀라운 보상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이 일에 대하여 매우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 갈 때에 매우 낙심하고 좌절했음이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집 주인으로부터 작은 일들이 주어졌을 것이고, 요셉의 심정으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주인으로부터 내려진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수행을 해 나갔고, 결국에는 그 집의 재산을 맡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의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마찬가지로 매우 억울한 처지에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어떻게 성실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했고, 결국 그는 간수로부터 인정을 받아 죄수들을 맡아 관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집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할 수 있는 이집트 왕 파라오 다음으로 최고의 권세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일들에 대하여 감당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보상을 얻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곳을 통하여 반드시 심은 자만이 거둘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3:8,고후9:6,갈6:7). 씨앗은 보기에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겨졌을 때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보기에 작다고 해서 버려둔다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작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작다고 해서 소홀히 여기게 된다면 그는 인생에서 어떠한 결실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주님께서도 그를 통해 일하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주님으로부터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2) 순결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가정을 파괴해서라도 주님의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사람으로서 훌륭하게 복음전도자로서 사역을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님 앞에서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들은 가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결한 가정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을 때에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요셉은 자칫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요셉은 그녀의 제안을 수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생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고, 감옥으로 향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거절은 결국 보디발의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자신의 몸이 간음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못한 사람이 행복한 가정을 보셨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정에서 일부일처의 원리를 깨뜨린 사람이 행복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러우십니까? 그는 약속의 여인이었던 사라를 뒤로하고 그녀의 몸종이었던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음으로서 가정을 파괴시켰던 경험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야곱을 부러워하시겠습니까? 그 역시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서 수많은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에는 형제가 형제를 파는 일까지 낳게 했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정의 순결은 곧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순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중요한 간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 주님을 따르노라고 말한다면 그는 가증한 일꾼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주님의 일꾼을 세움에 있어서 가정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통하여 말합니다.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딤전3:5) 한 집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남편과 가장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가 장차 주님 앞에서 많은 것들을 통치하는 자격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3)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들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시는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서 이루시기까지 그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에 의하여 이집트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 왕 앞에 나가 인정을 받아 나라를 맡아 관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그는 약 13년의 세월 동안 고통의 시간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 짧은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온갖 사랑을 받고 자랐던 그가 종과 죄수로서 살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결코 순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성공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인내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내의 세월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살다가 40년 동안을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지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사울로부터 무수한 죽음의 위험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 받았던 자들이라면 그들의 자리 뒤에는 언제나 인내의 세월, 즉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결과만을 두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롬8:25)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에서도 기록하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하여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히10:3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얻는 데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내로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때를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자리에서 보다 충성스럽게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면서 그분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3. 장차 우리가 맡게 될 세상

 

요셉은 왕의 권위로 이집트의 치리자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임명 됐는지 살펴 볼까요? "(파라오가) 자기가 소유한 둘째 병거에 그를 타게 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무릎을 꿇고 절하라, 하더라. 파라오가 요셉을 온 이집트 땅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았더라. 파라오가 요셉이게 이르되, 나는 파라오라. 온 이집트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손발을 들 자가 없으리라"(창41:43-44)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 지금 요셉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성경은 대부분 이집트에 대하여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만큼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장차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서게 될 장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는 이 땅에 천년 왕국이 오게 된다면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의 통치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시상을 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는 오늘 나의 모습을 통해서 미리 측정해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떠한 것들을 검증 받게 될까요?

 

1) 통치 능력입니다.

 

이것은 이미 누가복음 19장의 므나의 비유를 통하여 어떠한 자가 통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거두는 자가 당연히 많은 고을들을 다스리게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께서 장차 통치할 세상에서는 능력에 따라 고을을 맡기시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받은 구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것을 삶 가운데 결실을 맺는다면 당연히 많은 고을을 맡을 권세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고 여전히 세상적인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보상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한 능력을 주님께 보여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장차 누릴 권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충성도입니다.

 

주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통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장차 올 세상에서 통치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뜻 안에서 통치해야만 합니다. 그곳은 우리가 통치자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 마음과 생각대로 통치하려고 한다면 주님은 곧 후회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후회하시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통치자의 자리를 맡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검증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모세가 본 것처럼 그들은 주님의 보상에 관심을 두고 믿음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히11:26). 그들은 때로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 앞에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만 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분의 뜻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자들에게 다가 올 세상의 권세를 위임해 주실 것입니다.

 

3) 섬기는 자세입니다.

 

왕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왕의 자리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치 백성들을 굴복시키고, 다스리는 자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오늘날 목자의 개념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잘 살고, 평안하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섬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왕으로서 모범을 보이셨던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분이시지만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눅22:27). 이것이 바로 진정한 왕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섬기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차 다가 올 세상을 다스리는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기준이 무시된 채로 통치를 한다면 그는 필시 최초에 하나님을 배반했던 천사 루시퍼와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해 지고, 사람들 위해 서서 군림하려 하고, 처음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듯 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권세를 믿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4.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아직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소유들은 일시적으로 맡겨졌을 뿐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장차 하늘 왕국, 즉 천년 왕국이 이 땅에 임하게 될 때에 주님은 천년 동안 주님의 왕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게 될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땅에서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만한 생애를 살았다면 그는 반드시 많은 권세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으로부터도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생애를 살게 된다면 반드시 책망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후회 없는 인생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4 범죄의 시작 (창3:1-6) 이진천 2010-06-06
53 요셉에게 온 시험(창39:7-20)| 이진천 2010-06-06
52 유다와 다말(창38:1-30) 이진천 2010-06-06
» 충성스러운 청지기(창41:39-43) 이진천 2010-06-06
50 어떤 자가 성공할 수 있는가?(창41:39-43) 이진천 2010-06-06
49 에서의 세대(창36:1-43) 이진천 2010-06-06
48 두 가지 죽음이 주는 의미(창35:16-29) [1] 이진천 2010-06-06
47 다시 찾은 제단(창35:1-15) [1] 이진천 2010-06-06
46 야곱의 외동딸 디나(창34:1-31) 이진천 2010-06-06
45 야곱과 에서의 만남(창32:1-33:20) [1] 이진천 2010-06-06
44 떠나는 야곱(창31:1-55) 이진천 2010-06-06
43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창30:25-43) [1] 이진천 2010-06-06
42 레아와 라헬(창29:9-30:24)| 이진천 2010-06-06
41 야곱이 이동하여 우물에 이르다(창29:1-8) 이진천 2010-06-06
40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창28:10-22) 이진천 2010-06-06
39 그에게 축복하였더라(창26:34-28:9) 이진천 2010-06-06
38 그랄 지역에서의 이삭(창26:1-33) [1] 이진천 2010-06-06
37 에서와 야곱의 비교(창25:24-34) 이진천 2010-06-06
36 이삭의 믿음(창25:1-23) 이진천 2010-06-06
35 이삭의 결혼(창24:1-67) [1] 이진천 2010-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