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외동딸 디나(창34:1-31)

조회 수 4463 추천 수 0 2010.06.06 22:46:17

셋째 날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야곱의 두 아들 곧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각 자기 칼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 도시를 습격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날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며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리고 나왔더라. 야곱의 아들들이 죽임당한 자들에게로 가서 그 도시를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더라.그들이 그들의 양과 소와 나귀들과 그 도시 안에 있던 것과 들에 있던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어린 것들과 아내들을 포로로 사로잡고 심지어 집안에 있던 것을 다 노략하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여 나로 하여금 이 땅의 거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 가운데서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창녀를 대하듯 우리의 누이를 대하여야 하리이까? 하더라.(창34:25-31)

 

야곱이 에서와의 화해를 극적으로 성사시킨 후에 또 다시 그의 집 안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됩니다. 그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의 집은 발칵 뒤집히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에 의하여 보복을 하게 됨으로서 야곱에게는 결국 큰 짐으로 남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한 집안의 외동딸은 그야말로 모든 사랑과 관심을 받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들만 12명인 집안에서 외동딸은 그야말로 더욱 보배롭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외동딸이 강간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날벼락을 맞은 느낌일 것입니다. 바로 야곱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온 가족이 이 소식을 들은 후 한마디로 분노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왜 문제가 발생되었는가?

 

문제의 발단은 디나에게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던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 지역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그녀는 그 지역의 통치자였던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으로 타락(backsliding)하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서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일에 관심을 두고, 호기심으로 그들과 어울리려 한다면 그는 결국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믿음에서 탈선하는 일은 그 과정이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주님의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돌이키게 되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공간을 두셨음에 대하여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방주라는 공간을 두셨습니다. 이후로 율법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의 가정을 보호구역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모든 결을 해결했습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는 성막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고,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된 이후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보이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공간을 향하여 있었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주어진 공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 만일 무교회주의자들이라면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도 이 숨겨진 비밀이었던 주님의 교회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머물 공간으로 정해두셨음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교회의 지체가 되어 생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이 지체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에서 홀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디나와 같은 문제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공간입니다.

 

타협을 할 것인가?

 

야곱은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강간을 당한 딸 디나를 세겜에게 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주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은 집요하게 디나를 얻기 위하여 타협을 요구합니다. 세겜은 디나를 사랑(love)하였고(3), 심지어 야곱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합니다(12). 지금 야곱은 이 타협에 대하여 매우 혼란스러워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의 타협에 응할 것인가? 그것은 어찌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많은 교회들이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통합을 위한 에큐메니칼을 선도하고 있는 교회들을 뒤로하더라도 기존의 주님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교회들조차도 이미 세상과의 타협을 통하여 교회의 영적 타락을 주도하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은 세상의 혼들을 하나라도 더 얻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그 일들을 주도하고 있지만 그 마지막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야곱에게 시도되고 있는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제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우리와 함께 혼인하여 너희 딸들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들을 너희가 취하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는 그 안에서 거하고 매매하며 그 안에서 소유를 얻으라."(9,10)는 것입니다. 이 제안은 족장으로서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한 민족이 되어 더욱 강력한 민족을 구성하자는 것입니다. 만일 야곱이 강하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육신적으로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평생을 나그네로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유혹하는 많은 제안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좀 더 편하게 세상을 살 것인가? 아니면 힘겹더라도 세상과의 분명한 분리를 통하여 거룩한 삶을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리석다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국은 영광스러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과의 타협을 통하여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이들의 결국은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야곱의 대응자세

 

우리가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예민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전처럼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고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일까요?

 

야곱이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만을 하고 있을 때 이미 그의 두 아들(레위, 시므온)은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의 일들을 계획하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하몰과 세겜에게 할례를 요구하고 그들은 그 일들을 기쁘게 여겼습니다(18). 결국 도시의 성문에서 나갔던 모든 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이 일 후에 레위와 시므온은 할례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있는 그들을 모두 죽이고, 하몰과 세겜까지 죽인 후에 자기들의 누이 디나를 데리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6). 분명한 사실을 이 일이 야곱이 원했던 해결 방법이 아니었고, 또한 하나님의 뜻과도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은 이처럼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는 해결 방법은 결국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많은 상처를 낳게 될 것이며,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두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유언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잔인한 도구가 그들의 거처에 있도다.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은밀한 일에 가담하지 말며, 내 존귀야, 너는 그들의 모임에 연합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분노 중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내려 갔도다. 그들의 분노가 맹렬하므로 그것이 저주를 받고 그들의 진노가 잔인하므로 그것이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그들을 야곱 가운데서 나누며 이스라엘 가운데서 흩으리로다."(창49:5-7)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의 아들들이지만 오히려 그의 두 아들에 대하여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어떠한 모양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혹은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만이 인정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위의 주변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안겨다 주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모든 일들에 대하여 주관적인 해석을 하고, 또한 주관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자들입니다. 생각의 중심이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을 보십시오. 생각의 중심이 어디에서부터 오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잘 못된 것인가?

 

시므온과 레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행위는 결코 잘 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겜이 분명히 자신의 누이동생이었던 디나를 강간했고, 또한 이방인과의 타협이 불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행동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전쟁을 치루는 심정으로 이일을 보다 냉정하게 접근했고, 결국에는 모두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앞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고, 그 일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왜 잘 못된 것입니까?

 

야곱은 그들이 분노 중에 이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9:6). 그렇습니다.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이 분노 중에 행한 일이라면 그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분노 중에 있다는 말은 결국 미움을 가득 품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노를 품은 상태에서 행했을 때 칭찬을 들은 일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함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주님이 그 일을 칭찬하셨습니까? 아니면 책망하셨습니까? 사울 왕이 다윗이 개선할 때에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는 소리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결국 그 일이 사울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 가운데 분노의 결말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이 품는 것입니다(전7:9). 또한 분노는 잔인한 것입니다(잠27:4). 그것은 어떠한 형태이든지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의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미워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있는 상대에 대하여 미워하는 감정이 커져서 분노로 발전이 된다면 그는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어떠한 모습을 보이시고 계셨습니까? 분노하며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니면 이미 용서하시고 그들이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스데반은 또 어떨까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결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구원을 받기를 더욱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아무리 정당한 방법이라도 누군가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행동은 이미 하나님의 권한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오랜 교회사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 온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이렇게 성경의 이름, 혹은 하나님의 이름,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교수대에 매다는 일을 해왔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일에 희생이 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미덕은 용서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또한 용서를 해 주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일백 데나리온의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보셨습니까?(마18:23-35)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미워하거나 분노가운데 있다는 그가 바로 이 성경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 대하여 엄청난 값을 치루심으로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또 다른 과제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결론

 

디나의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그의 이러한 시험이 에서와의 화해 이후에 왔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줍니다. 야곱은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연약한 자였던 디나를 외출시킴으로서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근신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결코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귀를 기울이고, 깨어 기도함으로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시험에 대비하고 또한 문제를 만났을 때에 주님께 모든 문제의 해결을 요구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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