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결혼(창24:1-67)

조회 수 4256 추천 수 0 2010.06.06 22:24:49

이삭의 결혼(24:61-67)

 

61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사라가 죽은 이후로 아브라함의 가정은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삭의 결혼을 추진합니다. 더구나 이삭은 아직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그를 결혼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종을 불러 이삭의 아내를 구하도록 명령합니다. 그의 조건은 반드시 가나안 족속이 아닌 내 고향 내 친척에게서 아내를 고르라는 것과 반드시 데려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러한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로 향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아브라함의 종은 그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는 지금 기약도 없이 떠나고 있습니다. 그의 걸음은 그야말로 막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걸음은 마치 우리가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 그는 부담을 안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삭의 아내를 구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이 지금 그를 누르고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그는 기도합니다. 그가 아마도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종이었고, 주님은 언제나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살아 계심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절박한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매우 절박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는 우물 곁에 있다가 물 항아리를 내려 나를 마시게 하고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면 그녀가 바로 정하신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의 기도를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가 유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그의 입장에서는 절박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그는 사실상 기도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누구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물론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하거나 많은 기도, 혹은 부르짖거나, 금식을 하며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기도의 모습은 그들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도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

 

주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던 바대로 한 여인은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가지고 올라왔고, 그는 자신이 기도했던 바대로 여인에게 물을 구했으며, 여인은 그에게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먹이겠노라고 말함으로서 그의 기도가 완벽하게 응답이 되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동일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고 또한 동일한 응답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마도 그들은 신비주의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진 사실이며, 예수님께서도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결코 신비주의적이라고 판단을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기도가 비록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단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기도하는 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십니다. 사람들이 풍요로워지고, 기도의 필요성을 덜 느낄수록 응답에 대한 확신도 사라져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이 변할 수는 있어도 주님의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는 생각을 결코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과 리브가의 가족들과의 대화

 

아브라함의 종은 결혼을 성사시킴에 있어서 가족들과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합리적인 생각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 진리에 대하여 매우 곧은 자세를 가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합리적인 자세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접근하는 자세는 매우 필요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함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혼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닫고 좀처럼 열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시하려 합니다. 왜 이러한 모습들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하는 자들이 대부분 일방적인 강요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때로는 선포하는 방법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언제나 그러한 방법으로 전해진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책임한 복음 전도자들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은 강요하고, 윽박지르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말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이후로 많은 문제들은 일어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복음에서 멀어지는 모습들을 봅니다. 복음은 결코 비이성적인 영접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으로 믿어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보통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스러움을 드러내어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즉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믿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매우 합리적인 상태에서 영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열흘 동안 머무르기를 청하는 리브가의 가족들

 

리브가의 가족들은 그녀가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자 지금까지 그녀와의 정을 생각하여 열흘 동안 머물기를 청합니다. 그것은 그의 가족의 입장에서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보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한 삶을 사는데 조금만 더 지체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어릴 때부터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고, 충분히 세상에서 그들의 삶을 누리며 살다가 복음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그를 짓누르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그가 믿음의 삶을 살도록 가만두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많은 친구들과 생활습관들, 그리고 환경들은 더 이상 믿음의 삶 속으로 인도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그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놓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인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이 그들을 떠나겠다는 리브가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열흘 동안만 머물러 있기를 청하는 것처럼 세상은 그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다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좀 더 그들과 함께 하기를 청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술, 담배, 마약 등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가족, 직업과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놓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즉각적인 순종을 했던 리브가

 

리브가는 가족들의 생각과는 달리 즉시 자신의 집을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어찌 보면 부모에게 있어서 보통 섭섭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길을 떠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결행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원하신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관계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즉각적인 순종을 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 역시 그물을 깁고 있는 동안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주님을 만났고,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증거하는 중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리였던 마태도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결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주저하지 않고 그분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리만큼 복음을 영접하는데 신중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닐만한 자격을 갖춘 이후에나 교회를 다니겠다는 말로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자격을 갖춘 자들을 위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순종하는 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아직도 우리 가운데 복음을 순종함에 망설이는 자가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베일로 자신을 가리는 리브가

 

그는 자신의 남편이 될 이삭 앞에서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순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순결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보이지 않음으로서 서로의 진실을 나누고자 하는 리브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결혼에 있어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생활이 풍족해질수록 더욱 외모에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들을 보는 기준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어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는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건강한 여자가 소위 매력적인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마치 인형 같은 여자들을 좋아합니다. 시대가 지나면 이러한 미인의 기준은 또다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형수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외모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개성 있게 생긴 외모를 더욱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여자의 매력은 역시 그 마음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여자들은 결혼을 할 때 외모를 베일로 가림으로서 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보는 기준이 결코 외모에 있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외모로 사람을 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직 그의 마음을 살피고 서로 진실한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통하여 위로를 얻음

 

이삭은 리브가를 만나기까지 그의 어머니 사라로 인하여 매우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로 인하여 그는 위로를 얻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이처럼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만나면 불편한 관계를 조성하는 여인은 결코 현숙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위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그것은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특히 교회 안에서의 생활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많은 반성을 필요로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위로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유익한 말을 듣기를 원하며, 또한 보다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진 문제들을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직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기쁨이 되어 주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가진 것들을 나누어서 서로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리브가가 이삭의 마음을 위로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듯이 누군가를 위로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며 살기를 소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오히려 거치는 자가 되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고 있는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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