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엘세바(창21:33-34)

조회 수 1886 추천 수 0 2010.06.06 22:21:55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33,34)

 

이방인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의 동맹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를 통해 실현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까지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수모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일전에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한일을 겪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비멜렉으로부터 동맹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3)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비로소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또한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완전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까지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은 입었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기에 매우 부족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은 적도 없으며, 그를 축복하는 자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를 저주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한낮 무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삭을 낳은 이후로부터 그의 존재는 달라졌습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로부터 그의 존재는 매우 특별하게 비쳤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세상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그들의 믿음을 보이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그의 삶을 마감하고 떠나갑니다. 그렇다면 누가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되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탄생한 이후로 그의 믿음이 인정을 받는 사람을 살게 되었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말씀의 씨를 통한 믿음의 열매가 그의 삶 가운데 드러나게 될 때에 비로소 그의 믿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아브라함과 동일한 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들입니다(5:22-23). 그것은 결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놀라운 기적들과 능력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방인과의 조약을 통한 책임-거짓말하지 말라

 

아비멜렉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이색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23)고 요구합니다. 이미 거대한 부족을 형성하고 있는 두 사람의 계약에 이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생각한다면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처음부터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8:44). 이 말은 만일 우리가 거짓을 말하게 된다면 이미 그는 사탄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 까닭에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수차례에 걸쳐서 경고하고 있으며, 또한 신약교회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거짓말에 대하여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분명히 초대 교회 성도로서 예루살렘교회의 중요한 일군들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작정한 자들이었고, 그들의 재산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드리고자 했지만 결국 소유 가운데 얼마를 감추고는 베드로의 발 앞에 두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무엇을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명백하게 그들이 무엇을 잘 못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5:3)

 

거짓말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발견하셨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거짓말은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것도 속지 마십시오. 모든 거짓말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치신 적도 없으시며, 또한 그분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거짓말의 결과는 죽음입니다(5:5,10).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탄으로부터 나온 사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말과 관련하여 예수님을 죽였던 불의한 증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증인이 없이는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거짓증인을 찾았습니다. 결국 두 증인에 의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26:57-61). 이일이 과연 예수님 당시에만 있는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들은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증인들은 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말 한 마디로 인하여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고, 진실보다는 타협된 상황에서 진술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디 세상 법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현상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이단으로 정죄하는 교회 단체나 언론들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사실의 진위를 가려서 바른 진리를 말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미리 정죄를 하고 난 뒤에 거짓 증인들을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후에 자신들이 잘 못된 것이 판명 나게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미워하십니다. 오직 진실을 말하며, 진리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는 자들이 주님의 사랑을 입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비록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진실을 말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과의 삶을 통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과 소들을 취하여 언약을 맺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계약과정에서 독특한 행동을 보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브엘세바에서의 우물들이 아브라함의 소유라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양과 소들을 준비하여 아비멜렉에게 주었습니다(27). 아비멜렉조차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따로 떼어 놓은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보고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29)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암양 새끼들이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30)고 말함으로서 그 우물의 소유가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비록 아비멜렉으로부터 브엘세바의 우물들을 거져 얻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값을 치루고 우물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경제 원리에서 통용되는 기본적인 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결코 이 원칙에서 예외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죄는 결코 값없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느 것보다도 더욱 많은 값을 치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많은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가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고 거저 얻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은혜로 얻어졌다는 것은 결코 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값의 전부를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희생의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방적인 은혜가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히 문제가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값을 치른 것은 그의 소유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값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는 언젠가 또 다시 분쟁의 소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셨다면 이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는 것이며, 사탄의 끊임없는 송사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기준과 질서가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문제를 위해 값을 치르셨던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브엘세바의 의미

 

'브엘세바'라는 말의 뜻은 '일곱 개의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물이 없어 방황했던 곳이기도 합니다(21:14). 이곳은 지형적으로 이스라엘 영토의 남방 한계선으로(20:1, 삼상3:20)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브엘세바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곳은 물이 없는 곳입니다. 브엘세바라는 이름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 우물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곁에는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특히 한국 땅에는 어느 도시에나 교회가 존재합니다. 심지어 깊은 산골에 가도 교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복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육체의 평안과 축복이라는 기복신앙의 형태로 증거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대도시일수록 이러한 형상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물질만능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도시인들은 복음을 변질시켰습니다. 교회사를 돌아보아도 순수한 복음교회는 오히려 농촌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당은 있지만 복음이 없는(말씀이 없는) 교회는 우리의 영적 삶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그곳은 영적 브엘세바 입니다. 그곳에 미련을 두고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영적 삶이 위태로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갈증은 심각해져 갈 것입니다. 거듭난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서 브엘세바(말씀이 없는 곳)를 떠나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은혜 가운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브엘세바는 육신의 터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정착된 삶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결코 그가 영원히 머물 처소가 될 수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본래 우리 육신의 터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정을 쌓고 삶을 지탱해 왔고, 육신을 만족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세상은 우리와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도 원수가 되었고, 같은 민족 간에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생활권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3:20). 물론 우리의 육신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발을 붙이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안주하려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와 율법적인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세상 정부와의 관계였습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정치적 배경과는 관계없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서도(13:1-7) 순수한 교회를 지켜왔고, 율법적인 교회는 그들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정치와 결탁하고, 투쟁하며, 심지어 군림하면서 보존해 왔습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복음으로 거룩하고 순수한 삶을 지속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로마황제, 가톨릭,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는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핍박을 당연하게 여기며, 순교를 영광으로 여기는 그들은 이 땅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며 만족하는 많은 종교인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이 땅은 결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머물 땅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6:33)

 

그곳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또한 죄의 유혹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술은 왜 끊어야 합니까? 술로 인해 거룩한 삶에 치명적인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는 왜 끊어야 합니까? 지나친 흡연으로 인해 성결된 몸이 더럽혀지고(고전 3:16,17),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사업은 왜 정리해야 합니까? 그 일로 인해 스스로 실족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유발시킬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은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망설이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요소를 제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보이는 대부분이 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일을 무난히 해 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브엘세바에서 안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떠났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축복과 은혜의 출발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자리로부터 떠나게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분의 인도를 따라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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