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태어남(창21:1-8)

조회 수 1709 추천 수 0 2010.06.06 22:20:03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웃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고 또 이르되, 사라가 아이들에게 젖을 주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내가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던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창21:6-8)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그녀는 분명히 자신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의 고향을 떠나 온 일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만든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라는 웃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웃을 수 있는 날이 많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 비결이 오늘의 말씀 안에 숨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찾아오신 주님

 

성경은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라가 주님께 먼저 다가갔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사라에게 약속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약속에 따라 사라를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 일들에 대하여 어떠한 노력을 한 적도 없습니다. 약속도 주님이 하셨고, 주님이 자신이 친히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법대로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 스스로 아이를 만들어 보겠다고 노력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복음의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나누어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보고 계십니까? 이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만일 우리가운데 누군가가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분명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면 더욱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분명히 거짓 선생이요, 거짓 전도자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이 은혜로 주어졌다는 믿음을 가진 종교는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믿음의 기초로 삼은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아직도 내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십시오. 사라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비웃고, 자신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최소한 성경 안에서 보았을 때 전혀 관심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에게 약속을 하셨고, 또한 그 약속한 말씀에 따라 그녀를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명백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함 역시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시고 계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약속의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시는 주님

 

주님은 약속을 하신대로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주님 자신의 의지로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라를 만남에 있어서 그녀의 동의를 구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주께서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니"(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불가항력적인 구원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의 교리를 변호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이 보여주고 계신 모습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하여 반드시 이루실 것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에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주님께서 사람들의 동의하에 세상에 오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분은 단지 약속하셨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의지에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지키지 않으실 수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분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은 사라의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주시지 않기로 결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획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반드시 행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사라의 그러한 믿음 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 찾아오셔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안에는 이미 약속이 이루어진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앞으로 이루실 많은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공중에서 혼인 잔치를 벌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의 수고에 대하여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다시 내려와 천년왕국동안 우리와 더불어 통치하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 날에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했던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되어진 곳인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마25:41,벧후2:4).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존재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약속하고 계신 이후의 있어질 일들입니다. 반드시 약속대로 행하시는 분이신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정한 때에 낳은 아들

 

우리는 주님 앞에 많은 시간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응답을 받는데 있어서 조급하다는 생각을 가져보신 적은 없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은 그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던 해에 아들을 낳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2,5).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세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롯을 아들로 삼아보려고도 했고,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으며, 나중에는 아들을 얻기 위해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일까지도 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약속하신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아브라함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구하는 기도에 대하여 조급한 응답을 기대합니다. 그러다가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이 되면 자신의 뜻과 생각에 따라 행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시기에 대하여 가장 적합한 때를 알고 계신 분이 누구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응답의 시기를 바로 알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가장 완벽한 시간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크게 성장이 되는 시기, 우리의 가정이 풍성해 질 수 있는 시기, 우리의 사업이 형통하게 되는 시기, 우리의 자녀가 주님 앞에 헌신하게 되는 모든 시기.....등 모든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있지만 주님은 우리가 그 일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적절한 시기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 놀랄 정도로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실 때에 거두리라.(갈6:9)

 

우리가 육신을 입은 동안에는 반드시 지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약속입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정하신 때를 소망 삼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행복한 시간들을 사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명령대로 행한 할례

 

자! 그럼 응답이 있고 난 뒤에 아브라함의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4). 그는 비록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동안 믿음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속에 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 질 수 있을 만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행함으로 그의 믿음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결국에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 응답 받기의 과정보다는 응답 받은 이후의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실패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 응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면서 전혀 감사할 줄 모르고 저마다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더욱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한가운데로 지나가실 때에 열 명의 나병환자가 자신을 긍휼히 여겨줄 것을 구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명령을 받고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하게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께 온 자가 누구입니까?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다시 예수님께로 온 자가 없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그 믿음이 인정을 받은 자도 역시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응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과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특히 야고보서를 통하여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더욱 엄격하여 그들은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의 죄는 결코 사해지지 않는 다는 사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올바른 믿음을 가진 자들의 당연한 삶의 모습입니다.

 

사라의 웃음

 

드디어 사라가 웃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여자로서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유혹을 받을 만큼 아름다웠던 여자였던 것이 분명하지만 여자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녀는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에게까지 수모를 당해야만 했던 비참한 생애를 살았던 것입니다.

 

일전에 주님은 아브라함과의 대화에서 아들을 주시겠노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비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웃음은 자신의 신세에 대하여 가망이 없음을 보여주었던 웃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소망도 기쁨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남은 생애를 적당히 누리다가 세상을 떠나면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은 마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전혀 희망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웃었습니다.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살아갈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한 가운데 서서 보다 떳떳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며, 또한 그분께서 주신 은혜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웃는 얼굴만으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녀와 더불어 함께 하고 계심을 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일로 인하여 웃고 있습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실 사라보다 더욱 놀라운 사건으로 인하여 웃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녀가 경험했던 사실들로 인하여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계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모습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젖을 떼던 날에 잔치를 베풂

 

우리는 여기서 의아한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잔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젖을 떼던 날에 잔치를 베풀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8). 그리고 분명히 아들은 하나만 낳았는데 아이들(children)에게 젖을 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당시의 전통을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백일이니, 돌이니 하는 잔치를 벌입니다. 마찬가지로 젖을 떼야만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를 벗어나 완전한 사람의 모양을 가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은 그 때를 기념해 잔치를 베풀었고, 아이들에게 젖을 준다는 것은 그가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다른 젖먹이 아이들에게 젖을 물려 먹임으로서 진정한 어머니임을 보이는 당시의 풍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라가 9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젖을 뗐을 때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게 될 때 모두가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까? 과연 그들은 모두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실패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듭난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남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그 일들을 하지 못하고 지속해서 남들의 가르침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그는 결코 성숙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유아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은 유아들이 젖을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곁에 음식이 가득 쌓여져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젖을 주는 목사, 교사들만을 바라보며 젖을 달라고 재촉합니다. 그들이 아직 젖을 먹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비록 그들이 거듭났다 할지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교회에 큰 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히5:14). 언제까지만 젖을 먹이거나 또는 먹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일 수 있도록 훈련하고, 또한 훈련을 받으며,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를 통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라가 아이를 낳은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r에게 있어서 더 큰 기쁨이 있다면 그가 자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라고 있지 못한다면 그는 자식을 낳은 기쁨보다는 더욱 많은 근심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힘쓰고, 또한 믿음이 연악한 자들을 돌아보면서 더욱 성숙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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