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실수(창20:1-18)

조회 수 1859 추천 수 0 2010.06.06 22:19:17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대부분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같은 죄를 반복하는 실수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이를 극복하고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의 성질이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면의 죄성만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인물이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숨이 막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람들이 실수할 수 있는 모든 모양들을 조목조목 보여줌으로서 우리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의 수많은 실수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음은 우리를 소망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3:9). 부디 아브라함을 통해서 위로가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넘겨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기근으로 머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애굽(애굽) 땅으로 내려가 머무는 동안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결국 그의 아내 사라를 바로의 집으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극적으로 사라를 건져내셨고, 아브라함은 많은 재물과 가축을 얻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1:10-20). 그는 분명히 잘 못된 행동을 보였지만 오히려 더욱 풍성해 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그랄 지방에서 그 때의 상황과 너무도 같은 모습으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르다고 하는 것은 당시에는 기근으로 인하여 내려갔지만 이제는 그가 모든 면에서 풍족해진 상태에서 가축을 치기 위해 이동하는 중에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매우 불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도록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내를 이처럼 소홀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환경이 불리해지자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랄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의 아내를 통해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상황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넘겨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목숨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희생시키는 치졸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의 용기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가 얼마 전 보여주었던 롯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들로 구성된 용사 318명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여인들과 백성들을 찾아오던(14:13-16) 기백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 그의 모습은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매우 비겁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두 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의 모습이 과거에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살아왔던 일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의 모습입니까? 또한 지금의 어려움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극복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지난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타협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많은 이들을 아프게 만들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다면 그의 행동은 결코 선한 것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에게 선포하신 말씀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비멜렉에게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3)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아직 사라에게 가까이 하지 않았음을 보고하고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4)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아브라함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5).

 

하나님은 그의 이러한 변명을 들으면서 인정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범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나타나셨음을 말씀하시고 그녀에게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6). 만일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모두 반드시 죽게 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7). 아비멜렉과 그의 이야기를 들은 종들은 두려워하였고, 결국에는 그녀를 돌려보내는 일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보내고는 혼자서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상황들을 보면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구명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사라를 구하기 위해 아비멜렉과 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의 정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입니다. 우리가 저질러 놓은 죄의 결과들에 관하여도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넘겨주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방법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천사들을 동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보내기도 하시며, 때로는 직접 만나 설득하시기도 하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이 선지자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7). 선지자가 누구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주님의 종을 세우고, 또한 훈련을 통하여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전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님의 일꾼은 주님에 의해서 세워지며,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하고, 또한 주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의 구원을 안전하게 만들어 줍니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지켜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 역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의 삶을 지켜줍니까? 이것에 대한 대답 역시 주님이십니다. 왜 이토록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믿든 믿지 아니하든 사실입니다. 우리의 소유 역시 우리가 믿든 믿지 아니하든 간에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변명

 

여전히 아브라함은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잘 못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그의 표정은 매우 어리둥절한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가 실제로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이 과연 믿음의 사람이라고 불러도 괜찮은가?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의 행동은 결코 정상적인 믿음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완벽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 역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데 두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존경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주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만일 그들의 거룩한 삶이 구원의 기준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다른 세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오늘날에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과 심지어 직접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였습니다. 그가 순종하는 자였다고는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이 이토록 불리해졌을 때에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더욱 걱정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책망하고, 멸망시키시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감싸고 돌보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성품이나 행위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안전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나약함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편에서 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 보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변명을 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변명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 앞에 수치를 더욱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한 사실이 있다면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요일1:9).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범죄들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비록 아브라함에게 다시는 그러한 범죄를 하지 말도록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가 다시는 범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의 이 같은 마음을 기억하는 자들이라면 같은 범죄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행동-죄 값을 지불

 

우리는 앞에서 애굽 왕 바로의 행동이나, 여기에 등장하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행동이 참으로 이상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아브라함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책임을 바로와 아비멜렉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세상 법을 기준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면 그들은 당연히 무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에 대하여 무죄 판결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많은 재물을 아브라함에게 줌으로서 그들의 잘 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일 오늘날 정상적인 재판의 과정을 통하여 판결을 내리게 된다면 아브라함은 바로와 아비멜렉에게 정신적인 피해보상과 위자료를 물어야 마땅합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법칙은 매우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매우 공평하신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대하여는 반드시 죄 값을 받아내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잠시라도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바로와 아비멜렉을 만나서 죄 값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재물로 아브라함을 위로하고, 또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들이 용서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은 일시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죄는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어떻습니까? 죄의 문제가 정리되었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생각하신다면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의 죄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로나 아비멜렉이 드렸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드렸던 재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주님은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아브라함이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물을 모두 아브라함이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모든 것을 맡겼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과 능력, 재능, 심지어 자녀까지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으로부터 더욱 놀라운 상속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행한 대로 보상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만 관리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님은 이러한 사실들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의 문제가 해결 됨

 

더욱 흥미로운 사실가운데 하나는 아비멜렉의 문제를 아브라함이 해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데려간 결과로 모든 여자들의 태가 닫히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기도로 인하여 모든 여인들의 태를 열어 자녀들을 낳도록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통해 하신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이후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결코 우습게보거나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두 가지의 효과를 동시에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과 능력을 보이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단순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대하여 굴복하는 자세가 아니라 보다 담대하게 이기며 살아가기를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아브라함을 통해 보듯이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언제나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나약해서 수많은 시간들을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주님은 더 많은 시간들을 일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언제나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능력으로 더해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제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반드시 더욱 놀라운 일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2 사라의 죽음(창23:17-20) 이진천 2010-06-06
31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창22:1-2) 이진천 2010-06-06
30 브엘세바(창21:33-34) 이진천 2010-06-06
29 두 아들(창21:9-21) 이진천 2010-06-06
28 이삭이 태어남(창21:1-8) 이진천 2010-06-06
» 반복되는 실수(창20:1-18) 이진천 2010-06-06
26 롯의 아내(창19:26) 이진천 2010-06-06
25 롯의 구원(창19:1-22) 이진천 2010-06-06
24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대화(창18:32-33) 이진천 2010-06-06
23 사라의 웃음(창18:9-15) 이진천 2010-06-06
22 언약의 증표 할례(창17:27) 이진천 2010-06-06
21 영적 싸움에서 실패하는 이유(창16:15,16) 이진천 2010-06-06
20 새들은 쪼개지 아니하였더니(창15:10,11) 이진천 2010-06-06
19 진정한 아브라함의 상속자(창15:1-5) 이진천 2010-06-06
18 진정한 믿음의 사람(창14:17-20) 이진천 2010-06-06
17 잘못된 선택(창13:5-13) 이진천 2010-06-06
16 믿음이 주는 현실(창12:6-10) 이진천 2010-06-06
15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창12:4,5) 이진천 2010-06-06
14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창12:1-5) 이진천 2010-06-06
13 종교의 파생지 바벨론(창11:1-9) 이진천 2010-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