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대화
(창18:32-33)
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시는 장면을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대화하시는 모습은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대화의 내용을 떠나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거룩하고, 흠이 없으시며, 권위가 있으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도저히 참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 대하여 참으시는 분이시며(벧후3:9), 또한 매우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위로하시며, 책망하기도 하시고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일반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오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 모습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서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숨김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약속을 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딛1:2). 이것은 결코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분의 모든 계획들과 경륜들을 이미 성경을 통하여 공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주님의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통일교의 원리강론, 천부교의 오묘원리, 새일교의 말세의 비밀, 몰몬교의 몰몬경,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과학과 건강 등에 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세상에 충분히 드러내지 않으시고, 다시 그들의 교주들을 통하여 계시해 주었다고 주장하여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질서 없이 계시하시고 말씀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이미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드러내시기 위해서 계획하시고 또한 사람들이 임의로 쓸 것을 염려하여 단어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1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곳에서는 우리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장차 맞이하게 될 세상에 대해서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김없이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면 더 이상 현재 기록되어져 있는 성경 말씀에 어떠한 것도 더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신4:2,12:32; 갈3:15). 만일 성경 이외의 것들이 계시되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틀림없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말씀을 더하거나 뺌으로서 사람들을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해 오고 있기 때문에 올바로 분별하지 않는다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상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지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떠난 롯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롯은 본래부터 하나님께서 데려 오지 말도록 당부했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바라볼 때 소돔의 멸망은 아브라함에게 알릴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소돔의 멸망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당할 상처를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롯이 아브라함에게 상처가 된 것은 분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롯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동안 아들로 생각해 온 그였기 때문에 만일 그가 죽게 된다면 아브라함은 평생을 가슴을 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배려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지금도 동일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히13:8).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우리가 당한 자그마한 상처에 대해서도 배려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권위적인 분으로만 생각하고 계십니까?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삶과 더불어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대화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기도의 방법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또한 응답에 관하여는 알아서 해달라는 식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주님은 그처럼 재미가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시고 또한 그 안에서 해결책을 만들어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이브의 일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언제나 주님과 대화를 하고 자유롭게 동산을 거닐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또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가령 그들이 동물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 저 동물은 호랑이라고 하고요, 저 동물은 사자라고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괜찮겠지요?"라고 말하는 아담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가장 가까운 대화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죄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을 피해 숨었던 것입니다(창3:8). 나무들 가운데 숨어 있는 그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대화가 중단이 되고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분과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죄의 문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어 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논리로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2)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명백해졌습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대화가 시작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를 하시기 원하시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만일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을 신으로만 생각함으로서 장차 당할 심판의 두려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향한 배려와 사랑하심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은 받았지만 대화를 하지 못하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더욱 비극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께 소중한 존재이며, 또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많은 복들을 누릴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 앞에서 마음을 모아 대화를 시도하십시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구하십시오. 만일 주님의 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응답이 될 때까지 계속 졸라대십시오. 이것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방법들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약4:2). 지금 대화를 시도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결코 한 번 결정하신 것을 바꾸시는 법이 없으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번복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피 흘리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죽을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줄만한 몇 가지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받아가지고 내려 왔을 때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자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했었던 때를 생각해 봅니다. 모세는 이미 결심한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설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논리에 대하여 인정하시고 심판하시지 않으시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1-14)
모세의 대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또 다시 하나님께 그 백성을 심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의 우리가 생각해 볼 때 당황스러울 수 있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모세는 당당히 심판을 하시려거든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는 신과 인간의 대화라기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번복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계획을 바꾸시지 않는다면 관계를 끊겠다고 협박하고 나셨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재앙의 수준에서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신다고 말합니다.(창6:6-7, 욘3:10, 욜2:12-14, 렘15:6, 호11:8.....등) 이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명분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바꾸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로봇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남들이 심각한 상태에 있어도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려니 하고 지켜봐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보십시오. 처음에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다고 결정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이 있다면 멸하시겠냐는 질문에 뜻을 돌이킬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마지막에는 10명까지 타협을 시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타협에 끝까지 응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결국에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굽히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기도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분의 뜻을 굽히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돌이키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녀로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된다면 응답은 우리의 기대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