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이라는 곳에 들어가 모레의 광야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 있었더라.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시니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거기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떠나 벧엘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이동하여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인 아이더라. 그가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부르니라. 아브람이 이동하여 계속 남쪽을 향해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 머물려 하더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라.(창12:6-10)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파격적이면서 놀라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비록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 잔뼈가 굳은 사람일지라도 그곳을 버릴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약속을 보장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순종하여 그의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물론 순종의 과정에서 데라와 롯을 동행하여 온전한 순종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고향을 떠나 온 것만으로도 그의 행동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이 되는 것입니다(2).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7)
그는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곳에는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있었던 땅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 그는 주님으로부터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설마"하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그들과의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분명히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주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 땅에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더라도, 또한 전쟁을 치루는 일이 있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땅을 내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제단을 세웁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벌어지게 될 치열한 삶에 대한 각오와도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약속들을 보장받았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보장 말고도 엄청나게 많은 내용들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믿음이 시작되면서 자신들의 삶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지병을 가진 자들은 병 고침을 받게 될 것과,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삶에 대한 기대와, 가정의 문제를 가진 자들은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믿음의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매우 다른 것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면서 우리가 기대했던 사실보다도 오히려 대적해야 하는 대상들이 먼저 우리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것들은 결국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데 끊임없이 싸워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환경을 통해서 오기도 하며, 또한 자신 안에 있는 버리지 못한 죄의 모습들로 우리 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완벽한 조건에서 시작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힘겹게 만드는 요인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펼쳐질 것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굳게 섬으로서 주 앞에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삶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10)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서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기근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약속된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환상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철저히 깨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일들이 아브라함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경험들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만사형통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만들어 놓습니다. 어떤 이들은 많은 재물을 잃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건강을 잃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러한 일들을 만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되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욥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노아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일들은 예외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또 어떤가요? 이들은 모두 의롭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들의 초기 역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갖은 수모와 고통을 이겨낸 후에야 주님의 약속대로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그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허락된 땅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가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을 의지할만한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사람이 오직 주님의 말씀만으로 살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4:4).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잘되고 내 혼이 당신으로 인하여 살리라(13)
우리는 가나안에 도착하여 그의 기대와는 달리 도저히 머물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아브라함이 취한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취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결국 이집트 땅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와 더불어 적당한 타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이 안전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자신이 아내를 지켜주어야 하는 처지이지만 아브라함은 오히려 아내를 희생시키고 자신은 살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벗어나 이집트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타협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구조를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몸입니다. 그리고 몸의 지체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혹 대신해 주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은 서로 봉사해야 하는 곳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의지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임도 반드시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여인을 파라오의 집으로 데려가매(15)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곤혹스러운 장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설마 했던 일들이 현실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에게 민족을 이루도록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아내 사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그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서 아내를 이용하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으로는 하나님께서 설마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가겠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아내는 지금 파라오의 아내가 되기 위해 그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로 하여금 매우 절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고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결단들은 대부분 이렇게 절망스러운 결과들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파라오의 집으로 들어서는 사래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아브라함,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하여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허탈한 심정으로 서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토록 깊은 좌절에 빠져본 적은 없습니까?
사래로 인하여 파라오와 그의 집에게 큰 재앙을 내리시매(17)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을 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차례입니다. 깊은 좌절과 낙심 속에 있는 아브라함을 그냥 놔두실 리가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분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사래의 구출작전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실 선물까지 준비를 하시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희생자는 파라오와 그의 집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래로 인하여 그 곳에 큰 재앙이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사래임을 안 그들은 더 이상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내려진 재앙으로 인하여 사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고 계신 일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지금 그녀를 보호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이 비단 그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동일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며 도우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와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20)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실행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치스럽고 비겁한 일들을 아무런 가책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땅을 지정 받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지를 않고 가나안 족속과 기근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에 당도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신의 아내를 파라오에게 넘겨 줄 생각까지도 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절망의 상황으로 자신을 인도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내와 더불어 많은 소유를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분의 은혜는 결코 우리의 행위가 선해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이 충성스럽거나 주님의 보시기에 의로워서도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오직 그분께서 친히 하신 약속 때문에 우리의 편이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자녀로 삼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가난한자나 부요한 자나, 병든 자나 건강한 자나, 지식이 있는 자나 무식한 자나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라면 아무라도 괜찮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비록 부끄러운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중보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롬8:34).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이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유혹하고 넘어뜨리게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동안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진정한 순종이 있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