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비밀(창6:14-16)

조회 수 2204 추천 수 0 2010.06.06 22:02:34

너는 고펠나무로 방주를 짓고 방주 안에 방들을 만들며 역청으로 그것의 안팎을 칠할지니라. 네가 만들 방주의 모양은 이러하니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요, 너비는 오십 큐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라. 너는 방주에 창을 만들되 위에서부터 일 큐빗 안에 그것을 완성하고 방주의 문은 방주 옆으로 내며 그것을 아래층 둘째 층 셋째 층으로 만들지니라.(창6:14-16)

 

왜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크기와 방법들을 지정하셨을까? 사실상 하나님의 관심은 죄 가운데 자신을 맡긴 백성들을 심판하시는데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말씀하시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막연히 방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또한 교회의 모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구체적인 비밀들을 발견하는 데는 매우 허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방주가 주는 비밀들을 발견해 보고자 합니다.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라

 

우리는 역청과 관련하여 매우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역청은 히브리어로 "코페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역청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뇌물이라고 쓰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말에 놀라운 비밀들이 숨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역청은 물이 새지 않도록 빈틈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틈과 혹은 나무에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역청을 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청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 모세가 담겨졌던 상자에 역청을 칠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수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가 준수한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로 만든 궤를 가져다가 진흙과 역청으로 바르고 아이를 그 안에 담아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니(출2:2,3)

 

역청은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물의 의미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역청이 심판을 방지하는 재료로 쓰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역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담긴 상자에 역청을 칠하지 않았다면 그는 수장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고 믿음을 가졌다고 말한다면 그는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에서 건져내실 유일한 분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역청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뇌물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여기 있나니 주 앞과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앞에서 나를 대적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취하였느냐? 누구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학대하였느냐? 내 눈을 어둡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을리라, 하니(삼상12:3)

 

뇌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누군가 잘 못을 했다 할지라도 뇌물은 그의 잘 못을 정죄하지 못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뇌물을 받은 자는 이미 분별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에게 이러한 뇌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대속물로 바쳐지셨습니다.

 

그에게 일정액의 돈을 부과하면 그는 자기에게 무엇이 부과되든지 자기 생명의 대속물로 주어야 할지니라.(출21:30)

 

여기 쓰여 진 "대속물"이라는 단어도 "역청""뇌물"과 같은 "코페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마음을 달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쏟으심으로 모든 죄가 씻어졌지만 주님은 더욱 완전한 대속물이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에 이른 자들의 죄에 대하여는 결코 정죄하실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마20:28)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2:6)

 

만일 어떤 사람이 저에게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대속물이 되셨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역청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면할 수 있도록 하는 재료가 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르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이 역청을 바르지 않는다면 심판의 물이 그 안으로 스며들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그 안에서 살게 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뇌물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눈이 멀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안전하게 구원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방주의 크기가 주는 비밀

 

방주의 크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요 너비는 오십 큐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쓰는 길이의 단위로 환산을 하면 "길이는 약 137m,너비는 23m이고 높이는 14m 크기입니다. 이것을 계산하면 마루면적이 10359㎡로 거의 15,000t급의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방주의 크기가 아니라 그 크기가 주는 수치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방주의 길이가 300큐빗이라는 사실은 복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받게 될 것을 가르치는 숫자입니다. 이것을 3×100이 합쳐진 것으로 3이라는 숫자는 보통 하나님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모든 속성을 담고 있는 것이며, 100이라는 숫자는 약속의 자녀를 상징하는 숫자로 쓰여 져 온 것입니다.

 

우리는 3이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 등 많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의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숫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100이라는 숫자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는 것(창21:5), 예수님이 구원하실 자들에 대하여 양 일백 마리에 비유하시는 사실(마18:11,12)등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하실 자들에 대한 숫자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방주는 바로 이렇게 복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을 모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교제를 위하여 존재하는 모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해서 계획되어지고 만들어진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주의 너비는 오십 큐빗이라"는 사실은 성령 및 그분의 사역과 관련이 되어있는 숫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였을 때에 ...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 날은 예수님의 부활 이 후 5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치가 방주와 관련이 되어 그 너비를 50큐빗으로 하도록 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사역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임한 이후에 급속도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 사역은 비단 초대 교회에서만 있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로도 성령께서는 모든 부문에 있어서 교회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방주의 규모 안에 50큐빗의 너비를 규정하였듯이 교회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계2:7,11,17,29;3:6,13,22). 만일 교회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기를 위해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엡5:18)

 

마지막으로 "방주의 높이는 삼십 큐빗이라"는 말씀에서 30이 의미하는 숫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분을 배반하여 넘긴 유다가 그분께서 정죄 받으신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서른 개를 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다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기고 범죄 하였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그것과 상관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들을 성전에 내 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마27:3-5)

 

우리는 주님의 교회가 결코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충분히 값을 치루고 세워진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역시 주님은 값을 치루고 사신 것입니다(벧후2:1).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 아니라 은 30에 값을 치루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이러한 사실들을 믿는다면 그는 결코 다시 사탄의 종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침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30세 되던 해에 사역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헌신의 의미로 가르쳐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 모두가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듯 말씀만을 듣고 평상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헌신된 성도들이 모여 서로를 섬기고 교제하는 곳입니다. 모두가 대접을 받기만을 바라고 섬기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방주는 오늘날의 교회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주님의 피로 구원함을 얻는 자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창과 문이 주는 교훈

 

주님은 방주의 창과 문을 만들되 창은 위로 문은 옆으로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은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빛이라는 것은 복음과 관련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복음 안에서 사는 자들을 곧 빛 가운데 사는 것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요일1:7). 재미있는 사실은 이 빛이 들어오는 통로를 위로 만들라고 지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가정마다 창은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대부분 옆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방주의 옆에 창을 만들라고 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명령은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은 오직 하늘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세상의 철학과 지식,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논리들을 교회에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변질을 가져다주는 누룩들이기 때문에 교회는 결국 피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오직 교회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주님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에 창을 만들고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도록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옆으로 문을 내도록 하셨습니다. 그곳은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나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문을 위로 낸다면 누구 그곳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 14m의 높이를 타고 올라 방주에 들어 올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120년 동안 방주가 지어지는 광경을 본 자들이 옆으로 난 문으로 들어간 자가 노아를 포함해 8명에 불과한데 누가 들어 올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교회로 들어오는 문을 결코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누구나 들어 올 수 있도록 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떠한 자격 요건을 갖추도록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 초대에 응하기만 한다면 그곳으로 들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이제 우리는 방주가 왜 교회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교회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섬기는 삶이 있어야겠습니다. 부디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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