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4:19-22)
우리는 이미 가인의 후손 가운데 한명인 라멕에 대하여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는 실로 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시리라고 말하는 오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멕과 그의 아들들을 살펴보려고 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죄가 어떠한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세상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악의 모양들입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
이 말씀을 살펴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본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과정들과 그 모양들을 알고 바로 서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들은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습관화되어서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사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오직 주님의 뜻을 알고 적용하는 삶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두 명의 아내를 둔 라멕
우리는 라멕의 두 아내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죄의 후손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회교도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죄악시 여기고 죄인 취급하는 예가 다반사입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백인들은 그들을 야만인 취급을 하고 오늘날까지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라멕의 아내들에 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아내를 여럿 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큰 범죄는 자기의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상관하는 것일 것입니다. 오히려 정당하게 그 나라의 법으로 보장받은 상태에서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사는 것이 자신의 아내를 두고 은밀하게 죄를 짓는 것보다 더욱 낫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차라리 법적으로 아내를 여럿 둔 회교도들보다 매일 강간과 간음이 끊이질 않고, 가정의 반 이상이 이혼을 하는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가증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는 이유는 누구도 정죄 할 권한이 없으며 라멕의 경우를 들어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멕과 그의 아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비밀은 아내들의 이름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다"라는 이름의 뜻은 "장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실라"라는 이름의 뜻은 "그림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은 죄의 후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게 될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종교들의 특징이 많은 장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잡신들을 섬기는 자리에 가 보십시오. 당신은 아마도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는 우상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종교에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불교의 사원, 가톨릭의 성당, 이슬람의 사원, 심지어 무속신앙인의 집에 이르기까지 장식들은 가득히 채워져 있습니다. 아다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종교를 발전시켜갈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라"라는 이름의 의미인 "그림자"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할까요? 그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10:1)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림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는 것이지만 구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까?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먹으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고, 절기들을 만들어 지키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치고, 설교 강단을 제단이라고 말하며, 교회 당 안에 있는 물건들은 성물이라고 하여 거룩히 구별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금 그들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라멕의 아내 "실라"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화려한 장식과 그림자인 율법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야발은 어떠한 자인가?
라멕의 맏아들이었던 야발은 장막에 거하는 자들과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생활과 직업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장막에 거했다고 하는 것은 최초의 집단생활을 시작했던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말씀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고립되기를 원했으며, 보다 육신적인 안정을 누리려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행을 중단하고 자신들이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발의 또 하나의 직업은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직업은 겉으로 보기에 아벨과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벨과 야발의 직업은 매우 다른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지키는 자"(a keeper of sheep)였습니다. 그러나 야발은 "양을 치는 자"(such as have cattle)였습니다. 두 사람의 직업에 어떤 차이가 있냐고요! 아벨은 양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을 하고 지킬 뿐이었지만, 야발은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비록 짐승이지만 그것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이 되어 왔던 생각들을 깨뜨리고 자신들의 소유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린 세상에서 자신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기 위하여 분쟁을 일삼으며, 또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며, 세상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부유한 자를 높이는 현상들을 봅니다. 이것은 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이 가져다주는 쾌락과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게 된다면 자칫 낭패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가진 소유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맡겨진 것들을 마음대로 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들을 가지고 간음하거나, 육체적 쾌락을 즐기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에 쓸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들이 주님의 것으로 알고 보다 귀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만 할 것입니다.
유발은 누구인가?
성경은 유발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하프와 오르간을 다루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로 말하면 음악을 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의 역사가 언제부터인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유발에서부터 그 역사를 찾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론 음악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음악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가 유발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타락한 천사였던 루시퍼가 본래 음악을 맡은 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이 음악이 라멕의 아들이었던 유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음악이 사탄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음악은 사탄의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음악만큼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놓는데 매우 큰 힘을 나타내며, 그 아름다움과 감동으로 사람들을 쉽게 흥분하도록 돕는 일들을 합니다. 사탄은 음악의 이러한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들어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은 이러한 사탄의 무차별 공격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으며, 그들의 젊은 시절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노래를 하는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으며, 마약과 연관이 있고,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며 가정의 파괴를 부추기고, 심지어 자살하고, 연주 도중 기물을 파괴하며, 슬픈 음악을 들려줌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심한 자괴감을 안겨다 주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며 열광을 거듭하고 무엇이 선한지 악한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만들고자 하는 사탄의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거론했듯이 라멕의 아들들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죄의 모양들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발을 통해서 얻는 교훈은 바로 음악을 통하여 많은 이들을 죄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사탄은 언제나 음악적으로 앞서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동요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음악적인 완성도를 더욱 높임으로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갈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의 머리 속을 맴도는 음악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결코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기보다는 슬픔과 좌절, 그러고 절망적인 상황을 노래하는 음악일 것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그렇다면 우리는 음악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사람의 목소리 외에는 악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많은 교회들이 음악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가령 주일 낮 예배와 저녁에 사용하는 음악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약간의 비트가 섞인 음악을 사용하면 사탄 음악으로 간주하여 노래하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사실과 영적인 노래는 주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 음악이 사탄적이라는 이유로 주님을 노래하는데 인색해 진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노래가 어떠한 리듬과 분위기를 띠고 있는가보다는 바울의 권면대로 우리 마음속에서 주께 노래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아름다운 가락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상관이 없는 노래가 된다면 그것은 매우 가증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주님을 노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두발가인은 누구인가?
성경이 두발가인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놋과 쇠로 된 것을 만드는 자들을 가르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시대적으로 봐서 매우 발달된 문명을 살아가는 자들로 보여 집니다. 더욱이 그가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자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문명을 앞서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통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셨을까요?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민족들의 공통점은 과학문명을 발달시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와 같은 나라들이 그 대표적인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과학의 발달을 가져다주었지만 결코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우상들을 그들의 제단에 가져다주고 더욱 가증스러운 일들만을 일삼았던 것이 그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악한 것인가요? 우리는 그것을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과학의 발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과학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누리느라고 자신이 빼앗기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조차도 과학 문명 안에서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부흥사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 나라가 된다."고 설교하며 다녔습니다. 그들은 유럽과 미국을 그 예로 들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예수를 믿어야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엄청난 착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유럽과 미국의 부흥은 그들이 잘살고 있었을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 공황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을 보십시오. 그들은 비록 세계 최고의 과학 문명을 자랑하고 있지만 신앙은 점차로 그들의 발전만큼 퇴보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매년 수백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고, 성도들은 교회에서 멀어져 가고 있으며, 교회는 점차 세상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심지어 그들의 신앙을 유지시켜 왔던 성경마저 버리고 변질된 성경으로 바꾸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상황은 어떨까요? 우리는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국가들은 가톨릭 국가를 표방하고 나선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한지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것은 아직도 그들 가운데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발가인을 통하여 우리는 죄의 모양들이 과학이라는 모양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진단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본래 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이 가져다주는 문명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여지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부디 세상이 주는 문명에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멕의 세 아들이 주는 교훈
우리는 야발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유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던 그를 통하여 그것이 정치라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종 삼고, 가두고,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는 일들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교회를 철저히 분리시켜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먼저는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다음으로는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를 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정치를 하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소유가 주님께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 까닭에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며, 군림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섬기는 일들을 위해서 힘써야만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2,3)
유발을 통하여 보는 음악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시대의 노래는 모든 부분에 걸쳐서 삽입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풍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수용하는 자세도 버려야 하며, 반대로 거부하는 자세도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시와 곡조로 노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과학문명도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준다고 너무 쉽게 빠지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주님의 교회에 모이는 일을 방해할 수 있으며, 성경에 불신을 심고, 세상에 취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기준을 주님께 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 음악, 과학문명 혹은 경제... 이것은 라멕의 세 아들을 통해서 죄가 어떻게 장성해 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와 같은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결코 자신을 내어주지 말고 오직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