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노련한 목회자나 선교사들에게 묻습니다. 목회자, 혹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나는 당연히 그분들을 통해서 어떠한 방법에 대하여 듣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모두 동일한 답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환경, 물질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사가 반드시 뛰어난 언어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헌신이라는 무기의 보조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구제를 함에 있어서도 많은 물질이 더욱 많은 이들을 가난으로부터 건져내고 그들을 복음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결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물질도 헌신하고자 하는 자의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헌신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사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1. 헌신은 단순히 전임사역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재 전임사역을 하고 있다고 진정 “헌신”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라고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사역을 하나의 직업으로서 생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삯군 목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참 목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요10:11)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헌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양된 성도들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가장 모범적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을 목사, 혹은 목자(Pastor)로 호칭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예수님 사역의 뒤를 잇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목회자들도 성도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목사라는 명함을 들고, 전임사역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오직 목회만을 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이 엄청난 명예를 가진 것쯤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명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헌신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복음을 깨닫고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안디옥으로부터 복음전도자로 파송이 된 후에 그는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고후11:23-27).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오히려 감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자신이 사역자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또한 그일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고민을 보십시오. 그는 오히려 사역자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 앞에서 제대로 헌신된 모습으로 살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목회자! 그는 주님 앞에서 아무런 오히려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역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헌신된 사역자의 모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2. 헌신은 결코 무작정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마약을 제조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가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칭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헌신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의 부지런함과 열심만을 가지고 진정한 헌신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부지런하고 매우 성실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은 목양의 일을 하는 자로서 바르지 못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세상적으로 무능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바른 진리 안에서 행동한다면 그는 분명히 많은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열심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수고하는 자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매우 게을러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무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때로는 분리주의자로 인식이 되어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헌신의 기준은 바른 진리 위에 있어서 그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무작정 씨를 뿌린다고 열매를 맺지는 않습니다. 헌신된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일하는 것이 주님을 전혀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미없는 헌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열심만으로 우리가 헌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진리 위에 우리의 헌신을 더 할 수 있는 자세야 말로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헌신의 의미는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주님의 일을 위해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신이라는 용어가 결코 목회자들에게만 국한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명백하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헌신할 수 있는 은사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결코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은 성도들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능한 교회의 지도자라면 결코 그렇게 되도록 힘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가 가진 은사들을 주님을 위해 더욱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헌신을 매우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것은 헌신의 방향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가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유능한 성도가 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은 목회자가 얼마나 자신이 가진 은사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가에 평가기준을 두신 것이지 자신이 가지지도 못한 것을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을 보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므나의 비유(눅19:13-24)와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자신의 몫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자신의 몫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제 것인 것처럼 사용하고 열매를 맺으려 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헌신은 많은 문제를 낳을 것이 분명합니다.
때로는 목회자로서 가진 은사가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주님께 드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교회 내에서 심각한 열등감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칫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한달란트 받은 자나 한 므나를 받은 자가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악한 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일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시는 기준은 그들이 가진 것이 과연 주님께 과연 주님께 드려지고 있는 것인가를 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자가 많은 재물을 드리는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이 렙돈, 즉 한 고드란트 드리는 것을 더욱 가치 있게 생각하셨습니다(막12:42,눅21:2). 누가 헌신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능력이 없어도 몸이 약해도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를 위해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4. 헌신은 흉내 내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목회자를 위한 많은 세미나들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그곳으로 가는 목적은 한가지 입니다. 보다 주님께 효과적인 헌신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사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헌신하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그들에게 동일한 방법의 헌신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기도, 말씀, 찬양, 봉사, 구제 등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며 목회자들로 하여금 만능이 되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목양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만능이 되고자 합니다. 그들은 성공한 목회자들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성공한 이를 만나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헌신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이 발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서 물구나무 서서 걸어 다닌다고 합시다. 그는 분명히 많은 땀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지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동안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그가 아무리 멋지게 걸어다닌다 할지라도 두발로 걸어다니는 것보다 자연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 아무리 잘 연습을 해도 두 발로 열심히 뛰고 훈련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결코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바로 이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것으로 헌신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마치 두 손으로 걸어 다니려고 애쓰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반드시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은사(선물)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의 지체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덜 중요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기능들을 흉내내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왜냐하면 몸의 지체들이 자신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이상적인 몸이 되는 것이고, 또한 그곳에서 능력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은사들을 흉내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몸, 즉 교회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작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분명히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의 작고 약한 부분일수록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고전12:22-23,약3:5). 그것은 때로 노력한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눈이 좋아지는 것을 보셨습니까? 또한 입이 커집니까? 아니면 코가 커집니까? 물론 수술을 하면 좋아질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더욱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헌신을 흉내 내는 것은 바로 이렇게 수술을 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역할과 관계없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이 드려져야 합니다.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그리고 남이 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가진 은사들을 주님을 위해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모범이 될만한 사람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과 동일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전에 먼저 주님께서 내게 어떠한 은사(선물)들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어떻게 쓰셨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들은 단 한 사람도 동일하게 쓰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흉내 내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그는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5. 헌신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먼저 소유의 개념부터 다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 문제에 스스로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헌신했다는 자들이 재산의 문제를 놓고 분쟁하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가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물질을 보상하지 않으면 사역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들도 봅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을 진정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결코 헌신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소유의 개념부터 제대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넘기셨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아닌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며(창14:22), 통치하시고 계십니다(계1:5). 이 세상에서는 그분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들에게 모든 것들을 맡기셨습니다(창1:27-28). 그들은 모든 것을 다스렸고, 그 안에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범죄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사탄의 권세 아래로 넘겨주었습니다. 사탄의 일시적인 지배 아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다스려야 할 자리를 빼앗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값을 지불하심으로서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막10:45). 누구든지 그분을 믿지만 하면 그분으로부터 소유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이 땅의 것들을 우리의 소유로 삼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장차 불 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땅에 대 환난이 있은 후 천년 왕국 시대에 보상으로 이 땅을 통치하도록 할 것이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게 될 때에(계21:1) 믿는 자들로 하여금 상속으로 땅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롬14:8). 우리가 주님의 소유임을 보다 분명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유지시키고 계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그분이 처음 만드신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지금도 세상을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주님의 인내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벧후3:9). 이것은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헌신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라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유를 주장하는 순간 주님은 그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헌신된 자들은 결코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아는 자이고, 또한 헌신한 이후에는 더 이상 자신의 소유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전히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헌신한 자가 아닙니다. 헌신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소유는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6. 헌신의 동기가 주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만일 사람을 보고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면 그는 곧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하는 대상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헌신의 동기 또한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각종 집회나, 담임 목회자의 상담 등을 통해 헌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의 권유나 아니면 스스로 판단해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주님의 일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모든 민족마다 무속인(무당)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세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배워서 무속인인 된 학습무, 부모의 대를 이어 무속인이 된 세습무, 악한 영이 그 사람의 속에 들어가 무속인이 된 강신무가 있습니다. 누가 진정한 무속인(무당)입니까? 당연히 강신무입니다. 사실상 학습무와 세습무는 가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세 종류의 목회자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에서 열심히 배워 목회자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아버지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자신도 목회자가 되어 아버지의 목회를 세습합니다. 과연 이들을 진정한 목회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들 가운데는 진정한 목회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주님에 의해 세워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누가 부르셨습니까? 당연히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는요? 물론 주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어떻습니까? 모세, 엘리야, 다윗...등 모든 자들이 주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르심을 입은 이후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헌신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배워서 목회의 일을 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목격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목회를 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것을 변론하려 한다면 그는 분명히 삯군 목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많은 것을 배웠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역시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는 가짜 입니다.
헌신은 분명히 이러한 부르심으로부터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부르심도 없는 자가 헌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목회자로 헌신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과연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헌신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당신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