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도움을 위한 구조 정리

조회 수 3471 추천 수 0 2010.06.06 07:33:17

목회에 무슨 구조 정리가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구조 정리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성경에 기초하여 운영이 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성경대로 교회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당연히 구조조정을 해야만 합니다. 개 교회는 교회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운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역적, 환경적, 그리고 모인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그 방법을 달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기본적인 골격은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그 기본적인 구조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기본적인 구조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교회는 종국적으로 큰 혼란을 겪을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교회는 이 기본 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성도들의 위치를 어떻게 둘 것인가?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성도들이 분명한 교회관을 가지지 못한 적이 있었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 때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관에 관하여 가장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의 구경꾼으로 앉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나 성도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여지없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을 통하여 자신의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교회라면 어느 교회를 가도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매우 성경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주님의 교회를 판단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1) 성도들은 서로 연합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서로 지체가 되느니라"(롬12:5) 이 말은 교회 안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서로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2:20,엡4:4,골3:15). 이것은 성도들이 반드시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하며, 또한 몸의 일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두 가지 속성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와 지역 교회(Local church)로 구분합니다. 우주적인 교회는 성경에 주로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로 표현되어진 교회로서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부로서 장차 주님 재림하실 때 휴거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교회는 성경에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The churchs of Jesus Christ)로 표현되어진 교회들로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흩어진 교회들 각자가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몸에 붙어 있을 때에 진정한 지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만일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리된다면 그는 결국 죽게 될 것이고, 몸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문제가 있다면 치유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며, 능력 있는 성도들로 양육할 수 있는 매우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하나의 몸입니다.

2) 그들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가장 실수하는 것이 있다면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도 명백하게 성도들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2:6,고전7:7,벧전4:10). 이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같은 일만을 하도록 명령되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많은 기도를 하도록 훈련합니다. 또한 전도가 습관화 된 목회자는 전도훈련에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양육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는 모든 힘을 가르치는데 쏟아 놓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균형을 잃은 교회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몸의 모양은 다양하며, 각 지체가 하는 역할도 각각 다릅니다. 만일 모든 지체들에게 같은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눈에게 물건을 들도록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귀에게 말하도록 하겠습니까? 아니면 발에게 어떤 사물을 보도록 훈련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러한 방법으로 훈련하고 가르치려 한다면 힘이 들뿐만 아니라 몸의 기능이 마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기도와 말씀묵상, 전도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생활 속에서 습관화 시켜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기도의 능력을 통하여 병자를 일으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말씀의 지식이 있어서 훌륭한 성경 교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거리 전도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똑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가진 은사(恩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목회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보다도 더욱 뛰어난 영향을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은사들은 분명히 교회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당연히 그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충분히 능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3) 그들은 성숙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성장을 지속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성장이 멈추는 모습들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믿음의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찰수록 교회는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한 가정이 생활 능력이 없으면서 자녀를 계속 낳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결국 다른 가정으로 양자를 보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교회가 어린 아이들로만 가득 차게 된다면 결국 그 아이들은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의 교회 안에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부 교회는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성도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최고의 목적과 목표는 단순히 그들의 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단번에 해결 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매우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장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혹은 거듭났다는 말은 말 그대로 이제 갓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다고 그가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까? 아무도 "예!"라고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젖을 먹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나중에는 단단한 식물을 먹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 할 때까지 그는 성장해야만 합니다.

바로 목회자가 알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어린 성도들이 장성해서 스스로 묵상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낳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낳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도의 살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자세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2. 성도들을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가르침의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이 시대가 바른 진리 안에 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성도들을 각종 쟁점(issue)이 될만한 주제를 가지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교회들을 봅니다. 가령 바른 성경관의 문제라든지 교회관, 그리고 구원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이 시대의 교회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고를 심고, 자신의 교회만이 바른 교회라는 인식을 심는데 주력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것이 가르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성도들을 양육하는 최종적인 목표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방법은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을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 것인가요?

1) 하나님을 사랑(마음, 목숨, 뜻)하도록 가르치십시오.

매우 당연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교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평생 예배당 한번 짓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나고는 합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이 목회 하는 교회가 성장해서 큰 건물을 가지는 것을 소원으로 삼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교회의 건물을 지으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까? 아마 그러한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는 그는 필시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더욱 깊은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들을 소개함으로서 그들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더불어 아름다운 삶을 설계해 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일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종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거짓 목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자신들의 교회가 더욱 많은 교인들로 넘치며, 더불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겠다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진정 자신이 주님께서 종으로 세워주셨음을 믿는 참 목자라면 그는 사심을 버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이러한 이론에 대하여는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성도들에게 적용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 두셔야만 합니다.

2)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십시오(성도들간에, 그리고 불신자들을...)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성경에 "Charity"라고 기록된 단어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Love"와는 조금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사랑을 표현할 때 쓰여지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Charity"적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데는 조건이 따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사랑을 했을 때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러한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Charity"적인 사랑이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짝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만 하는 사랑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말도록 독려하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목회자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도 흔히 봅니다. 그것은 때로는 성도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참 목자라면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을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3. 교회가 할 수 있는 방법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충분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계획도 없이 목표를 향해 간다면 그는 거의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일단 아무 일이나 시작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미 교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제자훈련(마 28:19,20)

이것은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어진 방법입니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했었지만 결국에는 이 방법으로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조직이 필요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조직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무리를 두고 목회를 하는 이들의 푸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조직은 만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성도수가 약150-200명 정도라고 해서 그 이상 성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억지 주장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이 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을 수 없다고 돌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건전한 주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은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자연스럽게 조직화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제자화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질서 있게 움직여야만 합니다(고전14:40,골2:5,살후3:7). 그것은 먼저 교회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또한 그 일을 위임받은 목회자(고후5:20,엡6:20)의 지도에 따라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들을 양육하지 못했다면 교회는 목회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허둥지둥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제자들을 양육했다면 일사불란하게 성도들을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자 양육은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준비해야만 하는 특별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집회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말씀 선포, 찬양, 기도...).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상담이나, 교육에서 한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집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집회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매주 드리는 예배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목회자가 교회의 방향과 철학, 그리고 가장 필요한 성도의 생활을 말해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러 차례의 상담이나, 권면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교회를 찾을 것이며, 설교자는 그들이 문제를 만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방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주일 예배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에는 이 세상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적절한 기도 모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더욱 능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기도 문제를 나눔으로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또한 공동의 문제를 놓고 기도함으로서 서로 협력하여 문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풀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각종 기도 모임을 통하여 배워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인기 있는 모임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모임입니다.

또 하나의 모임은 특별한 집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필요한 것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반드시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가 정체되어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특별한 집회를 갖는 것입니다. 외부의 강사를 섭외 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체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자주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방향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의 안정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절한 집회는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3) 역할과 책임의 분담(회중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교회 안에서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목회자가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목회자는 설교와 기도 생활에는 익숙하지만 사회 생활에 대한 경험의 부족으로 성도들과의 교제를 함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노출시키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경험 많은 성도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성도들에게 상담을 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때로는 교회 안에서 많은 물질이 소요되는 일이 추진이 되었을 때, 목사보다는 성도들로 하여금 일을 맡기는 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들의 역할과 책임 분담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도록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적인 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은 회중교회의 형태로 교회를 운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내심의 부족으로 그러한 교회를 운영하는 교회는 많지 못합니다. 오히려 담임 목사가 전권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은 때로 성도들에게 많은 불만을 만들어 내는 요인들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목사가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결국 교회의 일을 등한시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일을 맡김에 있어서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시행착오와 많은 문제점이 있게 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장래에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일에 대하여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목사의 지시만 받는 수동적인 형태로 움직이게 된다면 교회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새로운 목사가 부임을 하게 되면 혼란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들이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행6:4). 그리고 집사들은 구제의 일들을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십시오(행6:1-3). 그렇다면 교회의 남은 일들은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다른 성도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 일들을 하 줄 알았고, 교회는 날로 성장해 갈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이 있는 교회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가장 중요한 것은 삶에의 연결이다.

교회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생활 속에서 그들의 믿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경건해 보인다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절반은 실패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생활을 통하여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1) 가정과 교회는 구별되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를 위하여 가정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대로 가정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역의 진행을 중단 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든 틀린 답입니다. 결코 교회의 운영을 위하여 가정이 희생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가정의 문제로 교회가 주님의 일들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교회와 가정 이 둘의 관계는 서로 보호를 받아야하며, 또한 서로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적당한 균형을 이루면서 질서 있게 운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교회 때문에 가정이 파경을 맞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주님께서 전혀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주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지켜야할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가정의 안정이 없이 교회에서 헌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불안정한 가정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오히려 교회와 가정 모두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성도들이 건강한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권면하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주님 안에서 믿음의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안정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를 뒤로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교회에 헌신할 방법을 찾아내고, 또한 교회의 필요에 따라 봉사할 준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교회와 가정이 적당한 조화와 질서를 유지했을 때 모두가 건강하게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은사는 삶에서 다양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부터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고전12:1-12). 그것은 사역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결코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마음 속에 품어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과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은사를 지닌 성도들로 하여금 삶에서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에 실패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서로가 가진 은사들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성도들이 지닌 은사들에 대하여 시기하는 일조차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자신보다 조금 지혜로우면 비방을 일삼고,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면 오히려 사탄적이라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자세가 더욱 사탄적이고, 마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렇게 다양한 은사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는 모든 은사를 통달한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많은 문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마다 가진 은사들이 있고, 그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그러한 은사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도들이 목회자보다 더욱 특별하게 보이는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기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회자로 세움을 받은 것과 은사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가진 은사들을 최대한 사역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자신들의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과연 성도들이 자신들이 지닌 은사들을 충분히 삶에서 적용하고 있습니까?

3) 교회는 그들이 생활에서 성경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가정을 감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성도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성도들의 가정이 어떻게 생활을 하고 있는지 방치해 둘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은 엄격히 보면 목회자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 것입니까? 그 답은 간단하면서도 그리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양은 끊임없이 목자의 인도를 따라 양식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목자가 양에게 양식을 직접 먹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양식, 즉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행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예!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직접 양식을 먹이려고 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과다 섭취로 문제가 일어나고, 때로는 영양 실조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양식에 적당한 운동입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배가 고프면 먹게 될 것이고, 배가 부르면 먹는 것을 멈추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목회자는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을 말해주고, 또한 그 필요성에 대하여 가르침으로서 마치 양들을 넓은 풀밭으로 인도하는 심정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명이 있는 자들이라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생명이 없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하여도 그들은 말씀을 덮어두게 될 것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말씀을 직접 먹이는 것이 익숙한 성도들이라면 그들이 양식을 앞에 두고도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목회자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목회자가 문제를 만나 사역에 소홀히 하게 될 때 굶게 될 것입니다. 물론 훌륭한 목회자를 만나면 언제나 넉넉하고 배부르게 양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성도들이 스스로 양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 모든 면에 있어서 유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시오. 그것은 목회자나 성도들 모두에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잇는 것입니다.

5. 교회는 결코 다른 종교 단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하나의 종교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일반적인 종교와는 분명히 구분된 것입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지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 오셨고, 또한 피로 값을 치르고 사셨으며, 또한 친히 주인이 되셔서 관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고, 성도들은 각 지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일반적인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방법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1) 교회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교회를 세워두셨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지하고자 하는데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장차 주님의 뜻 아래서 통치해야만 하며, 주님은 그것을 훈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이 시대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뜻입니까?

가장 우선시 할 수 있는 것은 "거룩히 구별되는 것"(살전4: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과는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들이 기독교 문화, 혹은 에큐메니칼이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세상의 문화와 다름이 없고, 또한 일반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심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지만 이것은 실제로 주님의 뜻을 외면하는 사탄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세상에서도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5:16-18)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는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초적인 생활에 있어서 기쁨, 기도, 감사는 언제나 함께 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벧전2:12-15)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이방인들이 교회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할지라도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그들에 대하여 순종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진리에 대한 타협이나 교회의 폐쇄 같은 명령에 대하여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통치를 함에 있어서 그들의 권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잇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교회가 들림을 받은 이후에 그 가운데 속한 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통치자로 삼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이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또 하나의 가르침은 바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벧전3:17)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고난이 따른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1:6). 그렇다면 당연히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삶을 살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주님의 뜻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당연히 그분의 뜻에 따라 존재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주님의 뜻이 무시된 채 사람의 생각과 의지대로 운영이 된다면 그것은 일반 사교 모임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교회의 최종 목표는 양적인 성장에 있지 않고 성도들의 성숙과 성장에 있습니다.

이 말은 자칫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을 가져올 수도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양적인 성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가 성장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의 영적인 성숙과 성장 없이 숫자만 늘어가고 있는 교회라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세상에 있는 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서 교회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잇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구원과 관계없이 구제와 각종 사회 활동을 통하여 사람만 늘여가는 형태로 발전되어 간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교회로 출석은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들만을 모아 놓고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교회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장차 천국에서 통치할 자들을 훈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교회는 이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않됩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안전만을 믿고,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주님의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다스릴 자들입니다. 통치할 자는 당연히 더욱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성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숫자적인 성장이 훌륭한 통치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기초가 든든하고, 그 토대 위에서 성실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반드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 가운데는 장차 왕이 될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얼마나 있는지를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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