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한 가족의 모습은 교회의 미래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를 다룸에 있어서 가정의 위치를 따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는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어져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금도 많은 목회자들의 가정이 파괴되어져 가고 있으며, 심지어 목회를 중단해야만 하는 사태에 놓이게 된 가정이 부지기수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 것이며,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디모데전서 3:2-5)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에 관한 서신을 쓰면서 가정과 관련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디모데는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둔 목회자인 것이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에베소 사람들의 교회에 첫 감독으로 부임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감독이 되기 위한 가정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1. 한 아내의 남편
바울은 첫 번째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규칙을 무시하고 사역을 합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 안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생활을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한 생활의 모습들은 때때로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변명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일들이 사라졌고, 바울이 디모데를 통하여 감독의 직분, 혹은 집사의 직분을 맡은 사역자들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왜 바울은 이처럼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가정의 안정만을 생각해서 써 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남편을 예수님으로 비유합니다. 더불어 아내는 교회로 비유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셨듯이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목회자(감독)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은 상징적으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린도전서11:3)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기 때문이니 그분은 그 몸의 구원자시니라(에베소서5:23)
이것은 목회자의 또 다른 사역의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목회자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 사역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감스럽게도 사역자가 하는 일들이 결코 그러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사역자의 자질은 결코 훌륭한 교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베드로전서5:1-3)
목회자의 삶이 본이 될 수 없다면 그가 전하는 말씀이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탁월한 모습만큼이나 가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한 아내와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과 같은 이치로 설명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버리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심으로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배반하시지 않습니다. 영원히 안전하게 신부가 될 주님의 교회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목회자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고백과 관련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의 아내가 될 교회를 위하여 하신 일들과 매우 관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이 되어야 할 목회자가 이러한 기본적인 간증이 포함된 가정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성도들을 인도할 명분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이 무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들이 이혼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 동성연애자까지도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누구에게나 맡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계획과 뜻을 알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온전한 가정은 필수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2.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
왜 이러한 조건들을 바울은 목회자(감독)의 기준으로 삼았을까요? 목사는 많은 영적 자녀들을 낳는 자들입니다. 자녀에게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곧 존경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가정의 자녀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면 많은 영적 자녀로부터도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존경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자라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능력 있게 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누가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할까요?
가정의 자녀들은 목회자의 생활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이미 한 몸으로 철저히 순종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자녀는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그가 부모를 보는 입장은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부모가 자녀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항을 하고 불만을 털어놓는 일이 허다한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을까요? 그것은 자녀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녀들에게 목양하는 일을 이해시켜야만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대답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목양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녀들로부터 협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변의 많은 분들이 목양의 일들을 자녀들에게 숨기려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것은 대부분 가난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환경이 좋아져서 목회자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목회자의 가정은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만일 부모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가난과 수치스러운 일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자녀들 역시 그 일들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주님으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자녀들에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로 인하여 교회의 재산을 가로채는 목회자들의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사역을 시작할 때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이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를 남들보다 더 낫게 키우려다 보니 많은 돈이 들어가고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일들을 어쩔 수 없이 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존경을 받는 목회자의 자녀들은 결코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보내고, 유학까지 시킨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로서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자녀를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성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없이는 결코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3. 교회인가? 가정인가?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것은 언젠가 저의 동료 목사 한 분이 이러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탁월한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언변은 많은 회중들을 사로잡았고, 그의 지식 또한 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약 5년이라는 기간에 걸쳐서 목회를 시작하여 약 300명의 교인과 120평의 대지 위에 4층 짜리 건물을 건축하는 기적 같은 일들을 일구어냈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촉망받는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바쁜 일정은 가정을 소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가정에 있는 날이라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한 토요일 하루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설교를 준비하느라 밤을 지새우다 보면 가족과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많은 집회와 심방으로 보내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어린 자녀를 키우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집회를 다니던 도중 그는 이성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분명히 능력이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찬양, 화사한 몸짓, 품위 있는 자태와 예절바른 행동은 분명히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미 망가지다시피 한 자신의 아내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모습에 반했고 결국에는 은밀하게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가 지나가 이러한 사실이 아내에게 들려졌고, 아내는 이 문제를 교인들에게 이야기함으로서 교회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때쯤 그는 저에게 찾아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바로 "교회인가? 가정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대답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가정입니다!" 이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인들 앞에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목사의 욕을 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혼을 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은밀한 교제를 해오던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혼을 결심한 것은 잘 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교인들도 이일에 동의를 했고, 그 자신도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목회자는 그 지역에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었고, 제 앞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종종 신문에도 장식이 될 정도의 유망한 목회자였지만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명해 질 필요는 없습니다. 훌륭한 목회를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쓰시기에 충분하지 못한 그릇이 된다면 그것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거짓 전도자들이 교회를 위해 가정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미 자격을 잃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집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로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4. 목사를 보는 기준, 무엇으로 볼 것인가?
가정적으로 온전치 못하지만 능력 있고, 탁월하며, 지혜로운 목사와 다소 부족하더라도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아내와 자녀로부터 존경받는 목사 중에 누구에게 더 점수를 후하게 줄 수 있는가? 저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 분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비록 가정이 불완전하더라도 그의 능력이 탁월하기만 하다면 그를 훌륭한 목회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건강한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목양의 일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별로 신통치 않은 목회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큰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가정이 안정되지 못할 때 생기는 아픔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의 문제로 인하여 가정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러 결국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삭부부도 역시 자식들을 편애함으로서 에서와 야곱이 서로 원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요셉을 사랑함으로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집트의 종으로 팔아 넘겼으니까요? 우리는 이외에도 성경의 많은 곳에서 가정의 불화가 가져다 주는 아픔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치스러운 모습들을 드러내 주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을 이끄는 자야말로 건강한 교회를 목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숫자나 물질로 평가되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매우 어려운 목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이 시대에만 존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보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가정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염려는 주님께 맡기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섬기는 자이지 주인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가정을 뒤로하고 주님의 교회를 섬긴다고 말한다면 그는 지금 일을 거꾸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5. 이는 비단 목사(감독)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딤전 3:21)
교회 안에서 진정 존경을 받아야 할 자들은 결코 잘 가르치거나 헌금을 많이 하거나 찬양이나 봉사를 잘하는 자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지금까지 말해 온 것과 같이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들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가정을 가지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 안에 파괴된 가정에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그들의 영적 정서는 결코 안정되지 못한 모습들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더욱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온전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모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 힘써야만 합니다.
* 가정은 목회자 자질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앞서서 하는 자는 먼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