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5:14)
아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선조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며, 또한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원망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 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한다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역사상 사람의 몸을 통하지 않고 태어난 최초의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하와(하와)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만들어졌으므로 실제로는 사람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담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순수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그리 중요하게 여겨질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태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담은 언제나 예수님과 비교되어 설명되어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과 비교되어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흡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흡사한 부분이 많은 반면에 세상에서 남겨놓은 일에서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담과 예수님의 같은 점과 차이점들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가치가 있으신 분인가를 발견하기 위한 것임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님은 무엇이 같은가?
우리가 이 문제를 거론하면 모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두 분은 모두가 죄 없이 태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들어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모두가 죄 없이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분의 속성을 닮은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이 사실은 아담과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우리는 여기서 두 분이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나신 분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두 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매우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 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아담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고, 예수님은 만드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과정을 생각해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나 육신을 먼저 만들었고, 다음에 혼을 불어넣음으로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 과정이 정 반대의 모습으로 전개가 되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창조 이전에 계셨던 분이시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셨고, 후에 죄로 인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었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있기 전에 이미 존재하신 분이셨고, 결국 마리아의 몸을 빌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국 아담의 본질은 흙이었으며,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통하여 증거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주는 재미있는 사건하나를 든다면 선악과(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던 사건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 명령은 아직 하와가 탄생하기 전에 내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아담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것이었지만 하와에게 있어서는 직접 들은바가 없는 까닭에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까닭에 사탄은 뱀을 통해 아담보다는 하와를 택해서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은 말씀에 견고히 서지 못한 자를 공격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말씀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와가 결국 사탄의 꾐에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아담 역시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의 명령을 잊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불순종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알지 못하고 죄를 범했을까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고려할 때 결코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오는 결과를 모르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실수로 그러한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장차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될지를 알면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 하와가 이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아내를 그냥 둘 수 없었으며, 자신도 그의 아내와 더불어 죄인의 몸이 됨으로서 결국 에덴에서 추방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성경을 통하여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아담의 속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을 때, 자신도 죄인의 신분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신부 된 우리들을 위해 기꺼이 죄인의 신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이 아내가 아니었다면 범죄 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었듯이 예수님께서도 신부된 교회를 세우시는 일을 포기하셨다면 굳이 육신의 몸을 입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면서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아담과 예수님은 전혀 죄와 상관이 없으며, 실제로 죄의 유혹 아래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직접 받은 분들로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죄인이 되었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예수님의 죄인이 되는 과정이 흡사했을지라도 그 결과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죄의 창시자로, 예수님의 그 죄에서 구원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8,19)
이것은 아담과 예수님이 같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결국에는 인류의 죄의 씨가 되어 결국에는 죄를 짓지 아니한 다른 이들에게도 사망이 군림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롬5:14). 그러나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죄인 된 자들을 구원하시고 의로운 자가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그가 범죄를 하고 난 이후에 취했던 행동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책임을 하와에게 넘기는 행동을 하였으며, 또 하나는 그의 육신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앞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몸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들은 죄가 가져다주는 결과들과 행위로서 그들의 죄를 가리려는 육신의 본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중요한 사건은 실제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도, 부활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가 범죄를 하고 난 이후에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인정하는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아내 하와에게 자신의 죄를 넘기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실제로 행위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행위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죄를 더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엡2:8). 만일 이에서 더하거나 뺀다면 그는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을 가렸던 무화과 나뭇잎은 시간이 흐르면 말라서 또 다른 앞치마를 걸쳐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은 동물을 희생시켜야만 만들어 질 수 있는 옷입니다. 즉 그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짐승이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마르거나 헤어져서 입을 수 없는 나뭇잎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헤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옷을 지어 입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지어 만들어진 복음이라는 옷입니다. 우리가 그 옷을 입었을 때만이 죄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행위의 옷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려 한다면 그는 머지않아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과 같은 실수를 거듭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우리가 결론적으로 아담과 예수님의 관계를 정리한다면 아담은 생령(살아있는 혼)을 가진 첫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살려주는 영을 가지신 분이라고 성경은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분들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으로서(로마서5:14) 장차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담과 예수님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인류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많은 편견들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모습을 발견하는 지혜로운 모습들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