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찬양이 경배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중적인 음악을 표방하는 CCM과 같은 음악은 사탄음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CCM은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불손한 동기나 다양한 음악 장르, 그리고 치밀한 사탄의 계략 아래 진행되어지고 있는 사탄 음악들의 침투 등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경계해야할 대상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사탄음악으로 치부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불려지고 있는 찬송들의 대부분이 대중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으로도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찬양은 단순히 한 개인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 권면에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말합니다. 서로에게 화답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들과의 찬양을 통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성도들과의 교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찬양이 오직 경배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교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 속에서 찬양이 없는 교제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교제를 위해서만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에 기록한 것과 같이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는”일에도 사용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찬양은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에도 매우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찬양은 단순히 노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찬양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에서 찬양은 언제나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가르칠 때, 감사할 때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찬양은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때에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행16:25). 우리는 여기서 특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과 실라 뿐만이 아니라 찬양을 듣고 있던 모든 죄수들의 결박이 풀렸던 것입니다. 찬양은 이처럼 사람들의 결박을 푸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5)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영으로만 찬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 말에 대하여 지지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뿐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혼에 속한 것으로 우리의 지식과 감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직접 영광을 드릴 수 없다면 그 찬양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찬양을 듣기 원하시며, 그 찬양은 영적 교제를 통하여 하늘에서 아름답게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