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많은 독서를 하라고 권합니다. 특히 좋은 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많은 독서에도 불구하고 그리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독서를 많이 하면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시 생각해 볼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서를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독서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사람을 이해하고, 또한 그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책이라는 공간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 혹은 다양한 사회생활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공간을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는 모두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면 그는 비록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는 있겠지만 존경받는 위치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고정관념(편견)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별력을 잃게 만들 것이며, 사회를 양극화, 즉 분열시키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모델로 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 합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이 물질과 명예, 권세나 지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흉내만 내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세뇌를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하기보다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들여다보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을 발췌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성경이 가르친 진리와는 전혀 다른 길로 걷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매우 경건한 사람들에 대해서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것들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기억될만한 몇 구절만 살펴봅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우리가 이 말씀들을 통해 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결코 물질적 풍요나 세상에서의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말할 때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칭찬받을만한, 곧 성공한 사람으로 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활동하실 때에 가난한 과부나,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었던 세리, 그리고 창녀와 같이 사람들로부터 천대받았던 이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과 제사장, 그리고 권력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심한 욕설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리새인을 포함한 기득권자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도 친구가 되어주셨다는 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이 없이 대하셨던 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할 만한 교훈을 주신 것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눅15:11-32)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더욱 소중하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큰 아들은 매우 성실하고, 아버지 곁에 머물렀던 자였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곁을 떠나서 방탕한 자였지만 결국에는 아버지 앞에 용서를 구하고 돌아 온 자였습니다.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혹은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눅10:30-37)를 통해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알 수 있게 합니다. 한 강도만난 사람이 옷이 벗겨지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곳을 지났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지나칩니다. 그들이 지나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거의 시체가 되어 있는 그를 만지는 것은 곧 부정한 것이며,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민19:11).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 그를 지나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고 떠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결론은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옳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관심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더욱 품위 있게 만들어 줄 것이며, 신앙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모두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의인으로, 어떤 이는 악한 자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 안에서 인물을 살펴보려는 목적은 단순히 그들의 행위를 본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자신을 모습을 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설계해 보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부디 성경 인물들을 살펴보는 동안 그들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비교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