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좌우에 못 박힌 두 행악자 중 한명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데, 두 행악자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이미 앞에서 소개된 것(23:32)처럼 마태나 마가복음과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두 행악자가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있지만(마 27:44; 막 15:32). 누가복음 안에서는 행악자가 예수님을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행악자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행악자는 예수님께 기대했던 혁명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비약된 논리로 다른 한 명의 행악자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41)을 보면 이들 두 명의 행악자에 대하여 변호하는 것이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벌이는 두 행악자의 논쟁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행악자를 향해 반박한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행악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함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행악자는 예수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비교하며 강조합니다. 이 행악자는 예수님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통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내용은 행악자에 의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행악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처형은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며, 십자가는 예수님이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죽음을 앞둔 행악자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이 행악자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소망적인 고백을 합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에 임할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행악자는 죽음 이후에 영존할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행악자는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그분의 왕국이 올 것을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 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왕권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행악자의 믿음을 돋보이게 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행악자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기록된 낙원은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합니다(창 2:8). 그 까닭에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사51:3).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죽음 이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6:22-31,고후12;1-4).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으며(2:11; 4:21; 5:26), 행악자가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