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른 뒤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과 싸우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돕 땅에서 입다를 데려오려고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와서 우리의 대장이 되라, 하거늘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나를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고난 당하는 때에 어찌하여 지금 내게 왔느냐? 하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런 까닭에 우리가 지금 너를 다시 찾아왔나니 이것은 네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라. 그리하면 네가 우리 길르앗 모든 거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거늘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고향으로 데리고 돌아가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주}께서 그들을 내 앞에 넘겨주시면 내가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네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주}께서 우리 사이에 증인이 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갔는데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대장으로 삼았으므로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주} 앞에 고하니라. (삿11:4~11)
길르앗 사람 입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고 작정한 이후에 이스라엘의 회개로 인하여 그들을 구원할 입다라는 사사를 보내시는데 그의 출생의 배경과 환경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기생, 즉 창녀였는데 입다의 형제들은 그 사실을 들어 집안에서 쫓아냅니다. 결국 그는 돕 땅에 거하면서 잡류들, 즉 가난하고 유리하는 자들을 모아 후에 길르앗 장로들이 도움을 요청한 사실로 보아 강력한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입다가 그의 형제들에게서 쫓겨난 이유는 사실상 그의 어머니가 창녀였다는 이유라기보다는 재산문제로 보는 것이 더 옳은 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는 형제들의 말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이 말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결코 낮선 모습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유산 문제를 놓고 가족들이 갈라서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3대를 넘기지 못하고 패가망신하는 처참한 결과를 낳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많은 원수를 만들고 그의 몰락을 위로하기는커녕 즐기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몰락을 거듭합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동정을 받지도 못한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입다의 태도입니다. 그는 형제들에 의해 비록 버림받았지만 대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과 같이 그의 형제를 죽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마을을 떠났고 그의 주변의 사람들이 많은 왕래가 있지만 어떠한 계략을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많은 이들이 찾아 온 것을 보면 상당히 덕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입다를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쓰실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수용하고 자신의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자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재침례 성도들의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바로 이러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저항하지 않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 법정에 고소 고발을 일삼으며 서로 싸우는 이들이 배워야할 교훈입니다. 부디 입다와 같이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다를 세우심(사사기11:4-11)
이미 형제들에 의해 외면을 당했던 입다는 돕 땅으로 쫓겨났지만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는 일이 발생이 되자 다시 입다를 부르기 위해 장로들이 보내졌고 그들과의 사이에 협상이 벌이게 됩니다. 사실 입다의 주변에는 허영심 많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3) 그의 지도력과 군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장로들이 자신들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입다를 찾은 장면을 통해 볼 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비록 입다는 사람으로부터는 버림받은 처지였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홀로 서서 그의 힘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사실은 그가 비록 형제의 곁을 떠나기는 했어도 주님마저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암몬과의 싸움의 결과가 결코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고(9), 증인으로 주님을 세웠으며(10), 이스라엘의 대장이 된 후에도 자신의 말을 주님께 고하는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11). 입다는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삶의 모습을 보임으로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자신의 신분이 천하고,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한다고 생각해서 주님마저도 버리는 이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세상에서의 신분과 처지를 고려해서 쓰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누구나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 자라면 귀한 일들을 맡기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세상의 것으로 부끄러워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부끄러워 할 것이 있다면 주님이 없는 삶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에도 수많은 일군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러한 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인간적인 자격 요건을 내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쓰시기를 원하시며,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언제든 주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순종하는 자세도 입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임을 깨달아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다와 암몬왕의 논쟁(사사기11:12-28)
암몬왕은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르단에 이르기까지의 땅이 암몬 또는 모압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자기에게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13). 그에 대해 입다는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그 정당성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주장의 내용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본래 암몬, 모압, 에돔과의 전쟁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신2:5,9,19), 그들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한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15-18), 이스라엘이 아르논을 점령할 당시에는 시혼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 땅은 그들과 관계가 없음을 설명하고, 또한 모세 당시의 모압 왕 발락은 결코 그 땅을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음을 상기 시킵니다(25).
입다는 그의 출신이 비록 천한 신분이어도 매우 분명한 역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압몬 왕의 시비에 대하여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지킬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에게 이러한 역사적 지식이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전쟁은 명분 없는 싸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지식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해야하는 분명한 이유를 말해주었고, 그의 지도력이 범상치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단순한 힘과 열정만으로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과 열정이 바른 지식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면 명분 없는 싸움만을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진리 위에 믿음의 능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만일 거짓진리 위에 믿음을 키워가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멀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보다 명분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바른 지식, 즉 진리로 무장하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입다의 서원(사사기11:29-31)
입다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천하고 무능할 수 밖에 없는 신분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암몬 자손에게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배후에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주의 영께서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고 길르앗의 미스바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바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29)
결국 이 싸움은 하나님께서 입다를 통하여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성급한 결단이 가져다 주는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전쟁에 자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한 승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지, 또한 승리를 확신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할 필요를 느껴서인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이 서원에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그의 소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 전쟁으로 인하여 자신의 지금까지의 수모를 만회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소망은 반드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집착이 그로 하여금 서원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 서원은 결국 자기의 딸을 죽여야 하는 더욱 큰 아픔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입다와 같이 하나님께 조건부의 기도를 하기도 하며, 뜨거운 믿음을 선보이고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삶을 승리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의 권세를 잠재울 능력을 주셨으며, 어떤 시험이 와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는 때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우리의 삶을 곤경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사사기11:32,33)
이미 앞서 말한바와 같이 싸움의 승리는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외형상으로 입다의 힘과 능력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일 뿐 그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입다의 승리는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로엘에서부터 미니스에 이르기까지 스무 도시를 치고 포도원 평야에 이르기까지 크게 살육함으로서 암몬 자손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입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암몬 왕은(28) 그의 백성들과 더불어 이스라엘 앞에 굴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암몬 왕의 교만과 입다의 헌신이 이미 싸움의 결과를 결정짓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싸움의 결론은 주님에 대한 태도에서 이미 결정지어졌던 것입니다. 입다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암몬 왕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유명한 싸움의 한 장면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통해서도 이미 들은 바와 같이 비록 외형상으로는 골리앗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 같은 싸움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주의 이름으로 나아갔던 다윗의 승리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이 싸움도 역시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의 싸움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그 싸움의 결론을 지어놓으신 상태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서 승리와 패배를 결정지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께서 우리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한 싸움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자칫 교만해진다면 패배는 당연한 결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승리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세상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약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언제나 승리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서원의 결과(사사기11:34-40)
입다의 경솔함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너무도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영접하는 자는 태우는 헌물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바가 있습니다(31). 그의 집에서 나오는 자가 자신의 가족이 될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잊은채 승리를 통한 자신의 수치를 만회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딸이 작은 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영접함으로서 자기의 딸을 제물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의 서원은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는 더욱 큰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백성의 사사로서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외동딸을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경솔함으로 인하여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입다를 통하여 인간적인 조건을 내세움으로서 주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것의 위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다가 자칫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주님을 향한 열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냉정하게 처신하지 않는 열정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온전치 못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각기 다른 은사들을 가지고 주님 앞에 헌신하며 충성하는 생애를 살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잘못된 열정이 가져다 주는 결과입니다. 우리의 공과에 집착하여 인간적인 조건을 내걸고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엉뚱하게도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집착하는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려 한다면 더욱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입다만의 슬픔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이 애곡하는 슬픈 사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솔함과 집착으로 인한 결과는 우리 자신의 아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변에 많은 이들이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건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좀 더 냉정한 자세로 모든 것을 주님의 뜻 앞에 내려 놓고 그 분이 주시는 능력을 따라 승리를 누리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