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8~10)
한 드라크마의 가치는 한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오늘날의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가 과연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이토록 소중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것을 찾을 때까지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는 모습이나 찾은 후 자기 친구들을 불러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이 일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찾았을 때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이토록 한 드라크마를 찾았던 이유는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열 드라크마는 오늘날 결혼 예물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대 결혼 지참금 형식으로 드라크마 열 개를 묶어 주는데 여자는 그것으로 머리를 장식합니다. 그것은 여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재산이기도 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 유대 여인들은 잠을 잘 때도 드라크마 열 개로 만든 장신구를 풀어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이 열 개의 드라크마로 묶여진 장신구 중에서 한 개를 잃어버렸을 때 그 충격은 매우 심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은 돈의 가치를 넘어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받은 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그 예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드라크마를 잃고 예물로서의 가치가 손상이 되었을 때 여인은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돈과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만일 이처럼 소중한 것들이 분실된다면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의 전 인생을 소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자, 즉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온 마음을 쏟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 여인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예수께서 복음 전도자들과 더불어 복음의 등불을 켜고 구원할 죄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면서 여전히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니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많은 곳에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려는 간절함에 대하여 표현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죄 아래서 저주받을 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찾으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부르시고, 또한 다가가고 있습니다.
여인이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죄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이 돌아 올 때까지 지속해서 찾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그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참으신다는 의미는 결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속해서 그분의 일꾼들과 함께 찾아다니시며 모두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면 주께서 잃어버린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경제적인 손익계산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즐거워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찾았기에 친구와 더불어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즉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죄인 한 사람을 마치 아들이 돌아 온 것과 같은 주님의 심정에 대하여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것은 아들이 매우 훌륭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도 한 드라크마가 큰돈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가 훌륭하거나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마16:26). 주님은 여전히 그 귀한 것들을 찾고 계십니다.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인 한 사람의 구원을 통하여 하늘에 속한 모든 것들이 그 기쁨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천사들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죄인이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때에 다양한 방법으로 도울 것입니다.
실제로 천사들은 성도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자로서 예언과 경고(창18:9,10; 삿13:2-24; 마 2:13), 인도와 교훈(창24:7,40; 출14:19; 마1:20,21), 혹은 보호(창32:24-29; 마18:10)와 같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천사보다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구원받는 이후에는 오히려 천사들의 도움을 통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하여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이 여인과 같이 간절함으로 죄인들을 찾으신다는 사실과, 또한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시기를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는 주님께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죄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진정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기뻐하심을 보기 원한다면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고 입술을 열어 구원을 복음을 소개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