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의 권면은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듣는 이의 입장에 따라서 매우 훌륭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상황에 처해있는 욥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말은 오히려 더 큰 아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장황한 설교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1) 욥의 대답
욥은 자신의 처지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가 지금 엘리바스에게 원하는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는 “나를 가르치라. 내가 내 혀를 억누르리라. 내가 어디에서 잘못하였는지 깨닫게 하라”(6:24)는 것입니다. 만일 죄로 인한 것이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미 온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욥의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알지도 못하는 죄를 무조건 회개하라고 하시지는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욥은 엘리바스를 책망합니다. 그는 엘리바스가 바른 말들을 하는 것 같지만 무엇을 책망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자신을 노리고 구덩이를 파고 있다고 말합니다(6:25-27). 바른 말이 위력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적절한데 쓰이고 잇지 않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들마다 적절하게 사용되었을 때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못 쓰여 지게 되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엘리바스는 바른 말들을 욥에게 흉기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지식이 있는 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지식이 있는 자가 반드시 훌륭한 선생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말하는 것보다 훌륭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2) 욥의 기도
욥이 현재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7:15). 그가 힘들어 했던 것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정작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7:20).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소연합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현재 그의 상황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의 육체는 너무도 심각할 정도도 상처가 심했고(7:5), 친구조차도 위로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오직 그의 마음을 알아줄 분, 즉 자신의 증인이 되어 줄 분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그는 차라리 죽음을 원했습니다(16:19). 그는 차라리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면하기 원했습니다.
욥의 기도는 매우 절망적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뵙기를 청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욥을 통하여 이 세상의 일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보이고자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절망가운데 잇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말들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 필요가 있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고 오직 자신을 향한 뜻과 계획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엘리바스와 같이 자신이 아는 것들을 말한다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처가 될 뿐입니다. 욥의 기도를 통해 보듯이 그는 더욱 절망의 상황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계신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 갈 필요가 있는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