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지역(데만, 수아, 나아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욥과 함께 애곡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욥을 찾아왔습니다(2:11). 그들은 저마다 자기 겉 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자기머리 위에 티끌을 뿌리고 이레 동안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욥을 보면서 그들은 친구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자 했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1) 욥의 탄식
이제 욥은 자신을 향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나온 것에 대하여 스스로 저주합니다(3:1). 이것은 지금까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하소연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며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성장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때 매우 행복하고, 완전한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게는 안전도 없고 안식도 없고 평온함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염려하고 있었던 고난이 자신에게 임했음을 고백합니다(3:26). 그는 이미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미 사도 바울에 의해서도 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복음 전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며, 사망의 몸을 지닌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롬7:24). 또한 죄인들 중에 자신이 우두머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딤전1:15).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잇었던 자였습니다. 욥은 과거에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왔지만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고난이 주는 열매
만일 욥에게 사탄으로부터 오는 고난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고난은 모든 믿음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만일 모세의 광야생활과 사울로부터 피해 다녔던 다윗의 생활,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들의 험난한 여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믿음의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처럼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더욱 신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없으면 성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난이 닥칠 때 느끼는 것은 결국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상실감입니다. 사실상 시험 중에 있는 모든 환경들을 이겨내는 일들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시간동안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0:3). 결국 인내의 과정을 누구나 거치지만 그것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것들은 아닙니다. 욥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땅을 사는 자들이 욥이 당한 고통만큼 시험을 당한 이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이 시험을 이겨낼 수 있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시험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