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8~40)
예수께서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어떠한 표적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그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그들의 가난을 해결하고,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스스로가 정해 놓은 기준 아래서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 속에서 함께 묻혀서 생활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보다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과거에 다윗이 이루었던 영광스러운 나라를 재건하고, 그들을 통치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비록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고, 신앙적으로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에돔 출신의 분봉왕 헤롯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소망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왕이 되는 기적을 보이시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생각처럼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모습으로 보이시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삶 속에서 기적을 베푸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표적들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로서 결코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먼저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해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하셨고,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간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형적으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결코 타락했다고 규정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아는 자들이었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미 헤롯왕과 결탁하여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눈을 속이고, 경건한 자들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에 헤롯과 더불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교활한 자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명예와 권세,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요나 자신이 특별한 표적을 행한 장본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기적을 나타낼 상황도, 능력도 없었던 상태였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요나를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나는 사건의 배경과는 관계없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바로 요나 자신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구원받은 것과 같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표적을 일으킨 자가 아니라 표적 그 자체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이들이 논쟁하는 부분들을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삼일 밤낮을 시간상으로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삼일 밤낮을 계산하여 24×3=72 시간으로 어떤 이들은 수난 주간에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 미루어 약 36시간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산이 논쟁의 중심에 떠오르게 된 이유는 교회가 점차 의식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날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주일성수의 개념을 도입하여 주일을 거룩한 날로 규정하고, 성금요일이라고 해서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시간이라고 단정하고 철야기도회를 한다든지, 물론 오늘날도 유대인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을 거룩한 날들로 규정하여 지키고 있는 자들도 상당 수 있는 상황에서 삼일 밤낮은 날들을 중요하게 다루는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 지켜지고 있는 날들에 대한 개념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물론 이것을 현재의 시간에 맞추어 토요일로 규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문제를 단 한 마디로 정의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우리가 특정한 날이 아닌 모든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함께하는 우리의 모든 시간들은 곧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날들에 매여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곧 초등원리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갈4:9-11). 우리는 특정한 시간에 매여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시간을 주님과 더불어 살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예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는 말씀에 대한 논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예수께서 굳이 땅속까지 가실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많은 문제를 낳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시면서 잠든 성도(죽었던 성도)들이 일어나 부활 후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장면이 나옵니다(마27:51-53). 그들이 부활한 것은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포함한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후에 영혼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당연히 땅속, 즉 땅의 심장부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영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고, 그들과 더불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요나의 비유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오늘도 오직 한 가지 표적만을 보이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의 모습들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자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 견고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위해 수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