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4:15~24)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흥미로운 구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잔치를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잔치를 위해 모든 것은 완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있다면 잔치를 치르는 일입니다. 그 일차적인 대상은 초대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 했습니다. 이 거절하는 이들이 누군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거절하는 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땅을 샀다는 이유로,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은 장가들었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그들의 거절은 매우 정중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한 이유가 과연 잔치를 거절할 만큼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거절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잔치에 참여할 수도 있었으나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후에 잔치를 준비한 주인으로부터 분노를 사게 만들었습니다.
땅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들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 넉넉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자들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잔치가 그들에게 호기심을 충족하거나, 그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한 주인의 분노를 봐서는 그들이 과거에 주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현재는 그들에게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고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 그분의 보호 아래 살아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들만이 정해놓은 율법의 틀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일까지 행했습니다. 그들의 부요함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자리는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마19:24, 막 10:25, 눅18:25). 부자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최종적으로 목적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삶은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 거절하자 주인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명령합니다. 이들을 초청하는 장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잔치에 초대된 대상이 외적 환경에 있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초청한 자들로부터 거절당한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에 의해 거절된 천국 잔치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이 잔치에 누구나 참여하도록 허락된 상태지만 여전히 자리는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천국 잔치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상태이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이 잔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마 9:37-38). 이 일꾼들을 통해서 여전히 비어 있는 잔치자리에 사람들을 채우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잔치에 초대된 자들의 수가 차게 된다면 그 때는 세상의 끝이 오게 됩니다.
우리는 잔치 집을 채우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를 보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종들에게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불러 온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강제적으로 교회 안에 사람들을 데려 오는 것으로 주님의 명령을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매우 왜곡된 집단으로 평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인도하는 곳은 천국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참여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22:11~14). 우리가 누군가를 천국 잔치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일에는 열심히 하지만 그들이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일에는 매우 소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비록 주님의 교회의 지체가 되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억지로라도 천국 잔치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잔치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일들을 진행하고 계시는 주님의 열정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아직도 이 잔치의 자리는 많이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수고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천국 잔치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날들을 보기까지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