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12:35~40)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신약교회 안에서 종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역자들에게 붙여지기도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 앞으로 다가 올 세상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종은 신분으로서의 종이 강조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사는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종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결국 교회를 부패시키고, 이단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신분으로 살아가는지를 규정해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마치 세상에서 커다란 행운을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과 장차 받을 보상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상상할 수 없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의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는 자라면 오직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게 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인의 명령을 벗어나서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의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종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지혜롭게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혜의 근본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인을 의식하지 않는 지혜, 혹은 창의력은 결국 주인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다른 불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려 했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서 이상한 불로 제사를 드리려다가 주 앞에서 죽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레 10:1-2). 종은 오직 주인의 명령을 바르게 알고 그 일을 온전하게 수행할 때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의 자세를 논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오늘날 기복신앙을 지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의 호화로운 삶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가난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넉넉한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종으로서 잠시 주인의 것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들은 청지기로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제물과 명예, 그리고 권세나 지식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들의 신앙을 병들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종은 자신이 호화롭게 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는 목적은 오직 자신의 주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한 종이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처지를 보면 주인이 잠시 떠난 사이에 그분의 명령을 따라 세상을 살고 있는 자와 같습니다. 즉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결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준비된 종이라면 주인의 오심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종이라면 조금이라도 늦추어 줄 것을 버랄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 합니다. 세상도 우리를 열매 맺지 못하도록 환경을 어렵게 만듭니다. 가장 큰 적인 육신은 우리 안에서 죄를 짓도록 지속적으로 유혹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죄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오심을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결국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이 심판은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서 두 가지 심판으로 나누어집니다. 의인,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주님의 종들에게는 보상이 주어지는 멋진 시상식이 함께 하는 자리가 될 것이고, 예수님을 거절하고 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멸망에 이르는 심판이 됩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큰 영광의 자리가 될 것이고, 불신자들에게는 최악의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함께 어떤 자리에서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멸망의 자리에서 지옥으로 던져지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죽음을 예약한 자들을 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 까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고 있는 종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부디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