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적 피로(왕상19:1-5)

조회 수 5991 추천 수 0 2011.06.25 07:26:22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피로(疲勞)라는 단어의 의미는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써서 쇠약해져 일하기가 힘든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 몸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되어지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 안에서 영적 상태에 대하여 피로(疲勞)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하기도 하겠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돌아본다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활동을 지속할수록 더욱 충만해지며,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피로라는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는 주님의 일을 행하는 과정에서 매우 힘겹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비록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피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영적으로 매우 지쳐있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열왕기상19:4)

 

그는 분명히 로뎀나무에 이르기 전에 놀라운 능력을 보인 자였습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아합과 이세벨에 대항해서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는 능력을 보였고, 또한 오랜 기근을 해소하는 큰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능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놀라운 능력을 보였던 엘리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지쳐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엘리야와 같은 상황은 현대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흔히 발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최선을 다하여 사역을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결과들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힘겹고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 까닭에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수도 없이 좌절하고, 그로인해 사역을 포기하려고도 합니다. 아마도 요한이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라는 기도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그와 같은 환경에서 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는 결코 사역자들만의 몫은 아닙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순간순간마다 자신의 안타까운 현실을 주님께 고백하며 하소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이미 물질 만능주의로 물들어버린 사회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세상의 많은 견제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권위자들은 경건한 자들에게 많은 핍박을 가하고, 세상에서 약한 자들은 언제나 희생을 강요당합니다. 다윗은 시편 73편을 통하여 이러한 세상의 불공평한 상황을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 나아감이 내게 좋사오니”(73:28)라는 말로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결국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불이익 당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어려운 환경을 만날 때는 영적으로도 매우 힘겨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도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는 영적으로 매우 성숙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자신의 육체 안에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에게 질병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이 질병이 떠나게 하기 위해서 세 번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병은 그를 떠나지 않았고, 그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고, 자신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 위에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고후12:7-9).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인 피로가 육신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들은 그들의 생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때마다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충만해지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승리하는 삶 뒤에는 반드시 육신적으로 시련과 환난의 시기를 거친 흔적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광야생활을 경험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요셉도 이집트 땅에서 노예와 죄수로 살았던 시절을 거쳐서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이러한 아픔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애에서도 아름다운 날들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피로의 현상은 어느 때 나타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시작을 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성경 안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을 들자면 사울 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을 경험한 자였습니다(삼상11:6).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답지 않게 치명적인 약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삼상15:24).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왕이 된 자였지만 왕이 된 이후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민심이 다윗에게로 돌아서자 그를 죽이려는 일을 도모하게 만들었고,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을 찾아갔으며(삼상28:7),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삼상15:22,23). 그는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입니다(삼상15:26). 그의 실패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이며, 언제나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자만이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 안에서도 또 한 사람의 영적 실패자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가룟 유다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판 제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왜 그가 실패했을까요?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난 현상이었지만 그는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며, 또한 자신이 누리게 될 부귀와 영화 그리고 권세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삼년 육 개월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짐이 없었던 상태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모의하고 있었던 대제사장(the chief priests)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제의하고 결국 은 서른 개로 언약한 후에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26:14-16). 결국 그는 자살로서 최후를 맞아 합니다(1:16-19). 그가 왜 이토록 비참한 순간을 경험해야만 했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영적인 일에 관심이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수없이 되풀이 하셨지만 그는 그 말씀에는 관심 없이 오직 자신이 앞으로 누리게 될 영광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피로해진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그 순간들이 육신적으로는 행복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칫 우리의 인생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경고대로 언제나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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