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고독한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품고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모습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현재 모습입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자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 지역에서 약 3년간 머물렀고(행20:31), 그 인근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까닭에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바울을 외면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습니다. 그들에 관하여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이일에 주동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가장 힘들어 하는 동안 그들은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누구입니까? 사역을 함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동역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함께하는 자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그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좋았던 모든 추억들도 잊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과 바울의 관계는 특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이며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그들은 바울에게 등을 돌렸고, 더 이상 바울은 주님의 교회를 세웠던 개척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아픔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상황에 대하여는 오히려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는 상황에 대하여는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 힘들어졌을 때 그들을 외면하거나 버린 적은 없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중에도 그를 위로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네시보로입니다.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16) 바울은 그의 관심과 사랑에 대하여 매우 깊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통해 보면 그가 매우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외면한 이유도 그가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한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를 포함한 아시아에서 주님의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보다는 로마의 감옥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상황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오네시보로만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큰 힘이 됩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의 의미는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오네시보로가 그의 환경이 좋기 때문에 바울의 곁에서 위로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어려운 중에 바울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홀로 바울의 사역을 돕는 과정에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고, 주께서 그의 집에 긍휼을 베풀기를 원한다는 말로 그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자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17)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그토록 섬기고 따른다는 것은 그가 하는 일들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났던 이유는 바로 바울의 사역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초대교회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로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가치를 알지 못했지만 오네시보로는 그 가치를 알고 지속적으로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당시에 결코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병약하고 왜소했으며 말을 잘 하지도 못했고 다만 글을 쓰는 것을 잘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나 훌륭한 교사였던 아볼로와 같은 인물과 비교하면 매우 부족해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오네시보로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훌륭하게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삶에 대하여 다른 이들에게 다시 조명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결코 영향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맞았을 때 오는 열매는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바울의 오네시보로를 향한 기도는 주의 재림의 날에 보상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네시보로의 동역자로서의 가치는 바울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줄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오네시보로와의 인연은 에베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바울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이러한 섬김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고,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네시보로의 충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배신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잇었고, 모든 어려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역을 떠나서 매우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와도 같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좋은 동역자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과의 관계를 가짐에 있어서 종교적인 차원의 교제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교제하려 합니다. 또한 상대방의 어려움에 대하여 깊이 관여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믿는 자들은 더욱 깊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 한 가족이며, 또한 의(의리?)로 하나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라면 그는 결코 좋은 동역자, 혹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끝까지 믿어주고 그를 위해 헌신할 줄 알며, 기도해 줄 줄 아는 자만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이러한 점에서 매우 뛰어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