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말할 것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말씀하소서, 하더라.
41 빚을 내준 어떤 자에게 빚진 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더라.
42 그들이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가 둘 다 너그럽게 탕감하여 주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게 말해 보아라.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하니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도다, 하시더라.
바리새인이었던 시몬은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록 예수님을 초대했지만 그분을 대하는 태도는 불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해시키려 하였고, 비유를 통해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그들을 미워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었던 시몬을 대하는 모습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그들도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행하려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분리되고, 그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위로하며, 구원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죄로 인한 세상의 문화와 전통들에 대한 것이지, 결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를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서민에게 있어서 오십 데나리온도 적지 않은 액수지만 오백 데나리온은 꽤 큰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쉽게 갚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한다고 했을 때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시몬에게 묻습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2) 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상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시몬의 대답은 신중하면서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43)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통하여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시키고 있었습니다.
탕감이라는 말은 빚을 모두 없는 것으로 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그 어원이 “은혜”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오는 은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탕감의 의미는 “취소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그 죄를 고백하는 자에 대하여 주님은 기억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 말씀하십니다. “네 판단이 옳도다”(43) 예수님이 시몬을 가르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설득해 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설득하려 합니다. 그들은 거리에서 외치기도 하고, 또한 자극적인 언어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며, 때로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면서 자신의 신념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독설만을 기억하려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었던 시몬을 대하는 모습과 같이 매우에 이성적으로 때로는 비유로, 때로는 칭찬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