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를 위한 수고(마9:36~38)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세상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원칙은 일하는 자에게 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자신은 예외로 해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원칙은 일하는 자에게만 먹을 것이 주어지는 것이 삶의 기본 원칙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이후로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원칙이기도 합니다(창3:17). 이러한 원칙은 인류 역사 이후로 소멸된 적이 없으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원칙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러한 원칙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기복신앙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서 노력하지 않고도 신의 힘을 빌려 풍성한 삶을 기대하게 만드는 속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삶들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한 넉넉한 생활을 보장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가난하고, 파괴된 삶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모든 문제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심지어 주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물론 성경 안에는 이러한 약속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신바가 있습니다(마6:31~34).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약속되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진리에 대하여 가르치는 일들을 해야 하는 수고를 말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이미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이 수고하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합니다(시128:1,2, 살전4:11). 만일 수고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수고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고 권면합니다. 바울도 이 수고에 동참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4:7)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는 수고를 싸움과 육상에서 달리는 경주와 같은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더욱 쉬운 표현을 쓴다면 그는 치열하게 일하면서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만으로 이 수고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땅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결코 없습니다. 만일 살고 있다면 그는 적당히 타협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실 수 없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그 험한 세상을 이겼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합니다. 그는 성경 어디에서도 자신이 능력이 있는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자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은 명백하게 정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9)라고 이사야 선자자는 말합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만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1)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수고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고전3:9)이라는 사실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의 수고는 힘을 잃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주님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결과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주된 목적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사실상 다른 이들이 구원을 받는 문제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 수고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들은 어찌 보면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위해서 수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거기서 멈춰 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7~38) 주님께서는 지금도 수확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추수에 동참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들조차도 마치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소원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분 자신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 일에는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오히려 이 수고로 인하여 더욱 많은 핍박과 고난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때에 분명히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고후5:10). 주님은 이 시대에 추수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이 추수가 비록 힘겨운 수고를 요구하고 있지만 주님의 날에 우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실 것을 생각한다면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디 주님의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