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시리즈(20) 전도자의 말

조회 수 2494 추천 수 0 2011.04.07 17:52:55

전도자의 말

(1:22~26)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우리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열정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존경의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전하지 못하는 자가 부끄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내용들을 보면 분명한 복음의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왠지 절박함이 보여서 오히려 믿는 자들에게 더욱 경각심을 일깨울 때가 많습니다. 물론 많은 이단종교들이 그들 사이에서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거리 설교나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간혹 유감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과 다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때로는 강요하듯이 전하려는 모습들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전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러한 사실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전도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보다 많은 절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에 대하여 거부감이 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전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도자의 언어를 통하여 복음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굳이 말을 논리적으로 잘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해시키는데 매우 필요하고, 복음전도에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능숙한 말솜씨가 복음전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위대한 지도자들은 결코 말을 잘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말에 능하지 못 한자라는 이유로 주님의 명령을 거절했었던 자였습니다((4:10). 예레미야 역시 어린 아이와 같이 말을 잘 할 줄 몰라서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거절했습니다(1:6).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바울이 많은 서신서를 쓰고, 또한 신약 시대를 대표하는 이방인의 전도자로서 살았다는 이유로 그가 매우 말을 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서신서에서 자신이 얼마나 말을 잘할 줄 모르는 자였는지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고후10:10,11:6). 이처럼 성경을 통해 보듯이 위대한 주님의 일꾼들이 반드시 말을 잘 했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말을 잘할 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들은 어떠한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정한 원칙을 소개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과(10:9),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들을 위해 사용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2:11). 그러나 실제 우리의 주변에서 전도자들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는 말들은 어떻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속이는 일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은 뱀의 입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이 마치 병을 고치거나,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만들어 주며, 형통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복음 전도자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가르치도록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 병이 고쳐지고, 물질적으로 풍성해지며, 형통하게 살게 되더라도 그것은 복음의 목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복음의 목적은 생명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지,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최종의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기에 앞서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종교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세상의 종교가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이 세상에서 보다 형통한 삶을 사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 내용들을 들어 보면 언제나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도자들이 그들의 기대에 맞추어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실제로 믿는 자들에게 형통한 삶을 기대하게 만들기 보다는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날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난과 인내의 시간들을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모습은 사실상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경고하기를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9~10)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복음, 즉 이단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여 전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문제는 당시의 전도자들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변개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세대에나 이와 같이 복음이 변질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정보와 지식을 얻기 쉬운 시대에는 복음의 변질이 더욱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당한 타협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들을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류의 타락이 시작되면서부터 있어 온 것들이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다원주의나 뉴에이지, 심지어 영지주의와 같은 것들은 대표적인 것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인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미 많은 부분에서 침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으며(다원주의), 사람이 꿈을 꾸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뉴에이지), 그들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만들어 사람들을 판단(영지주의)하는 모습들을 오늘날 교회 안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1:26)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질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도자에게는 특히 의미 있는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만일 여전히 사람을 의식한 말만을 하고 있다면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해 보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믿음 안에서 말하거나 행동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주님으로부터도 복음 전도자로서 인정받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속이는 자들은 강단 앞에 서서 독특한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강론을 하면서 그들을 인도합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또한 마치 천사의 음성을 흉내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거짓 선생들이 쓰고 있는 상투적인 방법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정확한 음성으로 정확하게 전달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결코 말을 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명령은 단순하며, 또한 복음의 내용도 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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