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들어가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와 야교보와 요한과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과 함께 한 마음이 되어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더라』(사도행전 1:13,14)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갖는 일반적인 편견은 보통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는 기도에 대한 생각은 결코 어떠한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받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만일 받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면 그는 주는 이로부터의 기쁨을 앗아가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지속하면서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어떤 이는 물질로, 어떤 이는 양식으로, 또한 어떤 이는 선물로 저에게 힘이 되어주고 용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속에서 제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때로는 그들에게 상처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무표정한 나의 모습을 통하여 필요하지 않은 것을 도왔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저는 그들의 작은 정성에도 감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였고, 실제로 이러한 감사가 그들에게 전달이 되었을 때, 그들은 주는 기쁨이상의 더욱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구해서 응답을 받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틀림없이 주님의 주는 기쁨을 더욱 크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실 것이고, 그들의 기도 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배우는 과정에서 "감사"가 반드시 함께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고민하는 것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 알고 있더라도 규칙적으로 하지 못하거나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에 기도가 정착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멈추어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들이 즉시 시력을 받게 되어 예수님을 따르니라』(마태복음 20:32-34)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날 때에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며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거듭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세워두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은 결코 예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필요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셨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셔서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정확하게 원했던 내용으로 응답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막연하게 건강을 위해, 물질을 위해, 지혜와 지식들을 위해, 믿음을 위해, 그리고 교회와 관련하여 목회자를 위해, 성장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이 있다면 그 질병의 병명을 아뢰고 고쳐줄 것을 기도하고, 물질이 필요하다면 그 액수를 제시할 필요가 있으며, 지혜와 지식을 필요로 한다면 그 내용을 아뢰고 말씀을 통해 해답을 찾고, 목회자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교회성장을 위한 기도라면 그 성장의 규모를 놓고 기도하는 것도 지혜로운 기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이러한 기도의 방식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기도가 자칫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미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사무엘기상1:10-13, 열왕기하18:23, 마태복음6:11, 누가복음11:5) 우리가 만일 기도의 내용이 분명치 않게 된다면 그 기도의 내용이 중언부언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태복음 6:7)
분명치 못한 기도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기도를 몇 시간동안 계속합니다. 그들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기도를 계속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결국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의 자녀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부모에게 계속해대면 짜증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분명하게 자신의 필요함을 말한다면 언제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듯이 주님도 우리가 보다 분명한 내용의 기도를 할 때에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정해 놓으십시오.
『아홉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으로 올라갈 때에』(사도행전 3:1)
예수님이 오시기 전 시대의 유대인들은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후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에도 이러한 기도의 습관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기도시간을 정해 놓으라는 말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어느 일정한 시간동안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
그러나 우리는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성경 안에서 그 이유를 발견하기는 매우 힘이 들지만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기도했었던 이유를 알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자율적으로 생각이 날 때마다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와 묵상을 위해서 우리는 특별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탄과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일을 위해 사탄은 얼마나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TV, 영화관, 음악회, 이성친구, 컴퓨터, 스포츠, 사교모임 등 나열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무기로 우리를 공격하려 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탄의 교묘한 손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이 언제이든지 상관은 없습니다. 새벽일 수도 있고, 늦은 저녁시간 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을 선택하여 주님 앞에 진지하게 다가가는 생활이 우리 가운데 함께 했을 때 우리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를 가지십시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들의 생활 공간에서 필요에 따라 방들을 구분해 둡니다. 주로 잠을 자기 위해 준비된 침실, 그리고 요리를 위해 준비된 부엌, 그리고 공부를 위한 공부방, 그리고 화장실, 유아방, 식당 등 각기 용도에 맞게 장식을 하고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여기에 또 하나의 방을 추가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방"입니다. 모든 방들은 준비가 되어 있어도 기도방을 준비하는 자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방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마태복음 6:6)
우리는 앞서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봤지만 이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방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화장실에 침대를 두고 잠을 청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엌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안의 아무 곳에서나 목욕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특별한 상황에 처하지 않은 이상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장소를 정해두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 조서에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들어가 자기 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기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더라』(다니엘서 6:10)
다니엘은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만일 그가 일정한 장소를 택하지 아니하고 적절히 장소를 옮기며 기도했더라면 고소를 당하여 사자 굴속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소를 고집했고, 또한 일정한 시간에 기도함으로서 고소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가 성전도 아닌 자신의 집에서 고집스럽게 일정한 장소를 고집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까닭에 사자 굴을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더 많은 곳에서 일정한 기도의 장소를 고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올리브 산의 등성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기도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사도행전 10:9). 빌립보에 있었던 루디아는 강가에서 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도시에서 나가 사람들이 늘 기도 드리는 강가에 앉아서 거기에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니라』(사도행전 16:13)
그러나 기도 처소에 대한 가르침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곳은 마가의 다락방입니다.(사도행전1:13,14)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하늘로 들리심을 받은 이후 십일간을 계속해서 같은 장소에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 한 장소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그곳에 모여있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일부 이단 종파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님이 어느 일정한 장소에만 함께 할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결코 어느 장소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움직이는 어느 곳이든지 함께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주님이 거하시는 전(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처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건한 삶을 위한 것이지 결코 그곳에만 주님이 거하시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보다 규칙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들을 위해서 우리는 분명한 기도의 제목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기도문을 외듯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낸다거나, 자신의 감정대로 기도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보면서 무엇을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구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기도생활의 정착을 위해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마땅한 기도처소를 찾을 수 없다면 예배당이나 한적한 장소를 택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자신의 침실을 기도처소로 사용하여 부부가 함께 일정한 시간동안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법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질서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고린도전서1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