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성공적인 생애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가 제 아무리 세상에서 물질적인 풍족함과 명예를 얻게 되었더라도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는 이미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여전히 물질과 명예, 혹은 권세나 지식을 얻는 것을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께서도 그러한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실까요? 상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들이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들에게 수차례에 걸쳐서 가르치시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들조차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후에도 자신들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잘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신 것은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라고 말씀하신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보다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해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는 기꺼이 몸을 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을 때 고백하기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들을 위한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버릴 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 양”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많은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일부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삯군 목자라고 생각되지만 무지하거나 교만함으로 그토록 어리석은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자녀들을 온 마음을 다하여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벧전4:8). 이 사랑에 관하여는 이미 주님께서 수차례에 걸쳐서 명령하고 권면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매우 가치 있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치 이상으로 자신의 생명보다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시고 계십니다. 더욱 우리는 흥미롭게 하는 것은 바울이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 분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생명을 버리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당연히 주님은 그를 통해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가 이 땅을 사는데 가장 의미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잠언에서의 가르침에서도 이 부분에 대하여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0)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거룩하게 사는 것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의 방식이 되어야만 합니다(엡2:10).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제사장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악한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러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너무 가혹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주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고 실행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고 믿었더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은 하지만 복음을 바르게 알고 전하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그것은 자칫 예수님 세대의 지도자들이 범했던 실수를 반복하데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세로는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담아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과정에 반드시 마귀의 세력이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상보다 거센 도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일로 인하여 자신의 목숨도 버려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물질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입기도 하고, 때로는 건강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이 경험했던 것과 같이 무수한 핍박(고후11:23-27)을 당하게 될 수도 있으며, 욥과 같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욥1:1-22).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멈추는 모습을 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3:4) 이 질문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당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심지어 기복신앙을 가진 자들 가운에 어떤 이들은 고난당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전혀 복음과 상관이 없이 전하거나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제자들과 초대교회 이후에 바른 교회와 성도들은 언제나 핍박의 자리, 즉 고난의 자리에 있어왔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면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장차 다가 올 세상을 고대하며, 오직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들을 위해 수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