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롬1:16)
구원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엡2:8), 사람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절하고, 무시합니다. 심지어는 그 사실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저주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전하는 자들을 힘들게 하고, 때로는 좌절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세상에 있습니다. 그들이 다가 올 세상, 즉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할 때쯤이면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힘든 상황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너무도 힘겨운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사람들은 오직 세상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복음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들의 삶을 형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지만(기복신앙) 사실은 그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곧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16:14,막8:34,눅9:23). 물론 주님은 모든 이들에 대하여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계십니다(벧전4:10). 그것은 때로 많은 물질과 재능들을 맡기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땅을 사는 동안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시기 위해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 마치 세상을 사는 동안 품위 있게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고, 그들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외면당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이 결코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이 땅에 소망을 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목적은 오직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구원을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말한 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땅에서의 일만 바라보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은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장차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자신도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하다가 주님께서 죽으셨을 때의 허탈해 하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라 볼 곳은 이 땅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땅은 장차 불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벧후3:7). 오직 하늘을 소망 삼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이 특별한 것은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즉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입니다. 한 때 유대인들은 구원이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었고, 결국에는 주님의 명령과 이스라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핍박이 있은 후에야 이방인 지역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구원은 결코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복음,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구원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 나올 때부터 구원이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백인 우월주의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유대인들 중에 일부는 구원이 그들에게만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에게 속한 모임만이 진리이며, 구원이 오직 그들에게만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대부분이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이단에 속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속이는 자들은 구원이 특별한 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대하여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사역을 통해서 충분히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금 앞서서 생각해보자면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생명을 드릴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에 대하여 다짐하기를 “내가 나의 생명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20:24)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는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넘겼던 자입니다(고후11:23-28). 그가 고백하기를 유대인들에게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몽둥이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위험을 당하고, 굶주리고, 목마르며 추위와 헐벗음 속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이처럼 모진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가치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른 복음과 진리를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고통을 피하고 싶었겠지만 죽음 뒤에 다가 올 세상을 생각하며 오히려 하늘을 소망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복음 전도자들이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오히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들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향해 돌을 던질 때에 죽어가면서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하고는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행7:55~60). 그의 모습은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복음전도자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이 땅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분명해졌습니다.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고, 하루하루를 신실하게 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하여 온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비록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받을 상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면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치 있는 삶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