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버리라(행10:9~16)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고정관념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가르쳐집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대부분은 성경이 가르치는 전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을 억누르는 것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많은 논쟁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성경과는 관계없는 것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실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믿음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경을 매우 해박하게 알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언제나 율법을 그들의 품에 두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 영접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의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죄를 자신에게 돌리라고 말하면서 매우 사악한 모습으로 돌변하여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사악한 존재들이 되도록 만들었을까요? 바로 그들 안에 숨겨진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시적인, 즉 헤롯을 대신할 왕을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정치적인 왕에는 관심이 없이,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들만을 찾아서 하나님의 왕국, 즉 구원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던 모습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바르게 지켜 볼 필요가 있는 자들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오히려 마귀의 종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전도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를 형성하는데 제자들은 이 고정관념과의 싸움을 비켜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하여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제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두기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상징적으로 네 귀퉁이를 맨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네발가진 짐승들과 들짐승, 기는 것들과 공중의 날 짐승들을 담아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 보내 베드로에게 먹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베드로는 기겁하여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하고 말씀하시면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이 세 번이나 계속되고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행10:9-16). 이 명령은 결국 주님께서 베드로를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에 보내시기 위한 환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 의해 보내진 사람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갔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에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위에 임하게 되고(행10:44), 주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게 됩니다(행10:48). 그것은 베드로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결코 유대인에게만 있게 될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있을 것이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뜨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게 되면 예루살렘과 유대인에게 뿐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의 맨 끝까지 증인이 되어 복음이 전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행1:8).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유대인들 안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과 스데반의 죽음(행7:60)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못했고,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를 전도한 일과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행12:2)이 있은 이후에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바나바와 바울에 의하여 이방인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행13:2-3). 이 모든 일들이 주님에 의해서 진행이 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들이 고정관념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수많은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고정관념들은 수많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중동의 수많은 모슬렘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적이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경계하고, 심지어 그들에 대하여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총을 겨눕니다. 이러한 분쟁들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들이 원수인 것일까요?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원수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구원으로 인도해야할, 즉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죽여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북한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지금도 매년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대한민국과 서로 총을 겨누고 원수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도 역시 주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라는 이유로 그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즐기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벗어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으며, 더욱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큰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서도 고정관념은 반드시 깨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구원의 대상에서 벗어났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창녀나 세리, 그리고 각종 병든 자나 구걸하는 자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십자가에서 달리신 순간에도 흉악해서 사형이 언도되었을 법한 강도를 구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가 보여준 것과 같이 주님께서 분명한 명령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만한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면 복음 전하는 행동을 멈춥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명령을 받고서도 주저했던 이유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바난의 소리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이방인을 향한 발길은 이방인의 구원을 향한 통로가 되었고, 이후로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가락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계시며, 우리를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어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고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