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우심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로새서 2: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로새서3:17)
해마다 가을이 되면 교회는 "추수 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추수 감사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의 3대 절기(성탄절, 부활절, 추수 감사절)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설교자들은 어떻게 이 절기를 말해야 하는지 곤혹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은 절기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꺼려하고 성경에 가르치는 감사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 추수 감사절에 대하여 바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 날을 절기로서 지켜야만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교묘하게 한국 교회에 누룩으로 숨어 들어와 매우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
두산 대백과 사전에는 추수감사절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이플라워호(號)로 신대륙에 이주한 반(反)영국 국교회파 프로테스탄트교도들(필그림 파더스라 함)이, 첫 수확을 하느님에게 바쳐 감사한 일에서부터 비롯된 국민적 축제일
크리스마스와 같이 성대하며 11월 제4목요일에 행한다. 이와 유사한 풍습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고구려 때 동맹(東盟)이라 하여, 10월에 전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의 선조인 주몽신(朱蒙神)과 그의 생모 하백녀(河伯女)를 제사하고, 풍성한 수확을 주신 천신에게 감사하는 농제(農祭)를 올렸다고 중국 《위지(魏志)》의 <동이전(東夷傳)>에 전한다. 이러한 의식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영고(迎鼓), 동예(東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는 제천의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추수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한 음력 8월 보름의 한가위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어서 차례(茶禮)를 올리는 풍습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또한 메이 플라워호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620년 영국 뉴잉글랜드 최초의 이민(移民)인 청교도(102명의 필그림 파더스, 즉 巡禮始祖)를 북아메리카로 수송한 선박.
무게 180t, 길이 27.5m, 돛 3개를 가진 배로,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商船)이었다.
1620년 8월 15일 사우샘프턴을 출항했으나, 같이 출항했던 스피드웰호가 누수(漏水) 고장을 일으켜 다시 돌아와, 같은 해 9월 16일 단독으로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였다. 11월 19일에 케이프코드만(灣)을 경유하여 11월 21일 오늘날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여 선박수리와 보급(補給)을 받은 후, 12월 21일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을 플리머스로 명명하였다. 이 선박은 이듬해 봄까지 플리머스항에 정박했다가 4월 5일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위에서 말하는 메이 플라워호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탑승하고 있었고, 그들이 미국에 정착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어 결실한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림으로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추수감사절에 대한 역사는 미국 내에서도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지금의 절기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의하여 최종 결정되어진 것이며, 이 날을 온 국민의 축제일이자 국경일로 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다는 기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추수감사절" 자체보다는 이것이 과연 교회 안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므로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참조 자료들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인들의 축제인 추수감사절
한국에서도 국민적인 축제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날, 추석 등과 같은 날로서 명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날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면 불신자이든지 막론하고 가족들끼리 모여서 함께 즐겁고 기쁜 시간들을 나눕니다. 그 날만큼은 반드시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온 지역에서 교통 정체 현상들이 벌어져서 우리는 "귀성전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날을 명절로 지키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축제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립기념일, 성탄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들은 독립 기념일이 되면 국가적으로 거대한 행사를 준비하며, 성탄절이 되면 한달 전부터 준비하여 가족들과의 만남을 시도하고, 추수감사절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서 터키(칠면조)를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미국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을 지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몇 해 전 겨울에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선교사님의 초청으로 그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성경대로 믿고 실천하는 분이었고, 미국 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파송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집안에 크리스마스 트리로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추수 감사절이 되면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터키(칠면조)고기를 놓고 축제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외국에 머물면서 설날이나 추석을 맞게 된다면 떡국이나 송편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 쌀을 구하러 다닐 것이고, 또한 흩어져 있는 가족들과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인들의 문화라는 사실에 대하여 저는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과 더불어 들어 온 누룩
사실상 추수감사절은 한국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 날을 부활절, 성탄절과 더불어 가장 큰 축제일로 지킵니다. 이러한 모습은 미국을 제외한 어떠한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수용했을까요?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복음이 주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많은 교회를 세웠고, 또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땅에 이토록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게 된 것도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 땅에 심기 시작했고, 더욱이 그 문화의 진원지를 교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인들에 대하여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닙니다. 물론 저에게는 매우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미국인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소 불만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본래 미국 땅은 인디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개척해 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방해꾼들이나 다름없는 원주민(인디언)들을 사정없이 총으로 쏴 죽이고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그리고는 미국 전역을 차지한 그들은 이제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미국의 힘이 세계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복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 많은 누룩들을 섞어서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누룩들로 인하여 교회는 완전히 부패되어지기 일보 직전의 순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추수 감사절에 대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생각을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헌금하는 날"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은 한국 교회 내에서 헌금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한국 교회에는 미국인들이 목회하는 교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일년 중 가장 많은 헌금이 들어오는 날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은 한국 교회를 부패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않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기복신앙의 열매
그렇다면 어떻게 추수감사절은 이처럼 쉽게 한국 땅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요? 물론 미국인들에 의해 복음이 들어왔고, 또한 그들의 문화를 이 땅에 심는 데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상 그 주된 원인을 기복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이처럼 엄청난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기초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이 드릴수록 많은 복을 받는다"는 생각과 가르침은 초창기부터 교회가 가르쳐 온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1년중 한 날을 정해서 드릴 필요가 있었고, 가장 적합한 날이 바로 추수 감사절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11월 4째주 정도가 되면 대부분의 농사일이 마무리되고 수확을 거두어 결산하기가 좋은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농사의 일을 하는 자들은 자연의 도움이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음 해에 풍성한 농사를 기원하는 의미에서도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기해서 예물을 드림으로서 그들 스스로 위로를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운영과도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교회는 이 절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날의 걷혀진 헌금과 헌물로 1년동안 교회를 운영해야 했고, 기복신앙에 바탕한 성도들의 헌금과 헌물은 자연스럽게 이 절기에 맞춰서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기로서의 추수감사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갈라디아서4:9-11)
바울은 복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다시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절기를 지키는 것을 가리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만일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분이라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마도 더욱 놀라서 저주에 가까운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도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절기를 교회가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미국인들에게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만 그 넓은 미국 땅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날을 기억하라는 말조차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성경이 기록된지 약15세기가 지나서야 있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순교 당한 수 천만명의 사람들을 기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휴일을 제공하고, 모여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들을 기억하며, 일년 중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절기인데 반하여,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기념하여 절기로 삼은 것은 명백한 누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날들을 절기로서 받아들이고 지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복음을 처한 것으로 만드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18)
우리는 위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게되면 종종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들을 봅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하지 말아야 합니까?"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이러한 자들이 있다면 저는 그가 결코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자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많이 "감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약231회).
그 감사는 결코 우리가 좋은 일만 일어날 때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조건도, 약속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만 어느 때, 무슨 일에든지 감사하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렇게 감사를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즉시 실족하여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들 것이며, 또한 우리를 달콤하게 만드는 것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장차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주어질 보상으로 인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절기로서의 감사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하고, 기억될만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교회에서 감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부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들어 온 누룩에 속지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된 감사와 안식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로새서3:17)
해마다 가을이 되면 교회는 "추수 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추수 감사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의 3대 절기(성탄절, 부활절, 추수 감사절)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설교자들은 어떻게 이 절기를 말해야 하는지 곤혹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은 절기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꺼려하고 성경에 가르치는 감사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 추수 감사절에 대하여 바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 날을 절기로서 지켜야만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교묘하게 한국 교회에 누룩으로 숨어 들어와 매우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
두산 대백과 사전에는 추수감사절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이플라워호(號)로 신대륙에 이주한 반(反)영국 국교회파 프로테스탄트교도들(필그림 파더스라 함)이, 첫 수확을 하느님에게 바쳐 감사한 일에서부터 비롯된 국민적 축제일
크리스마스와 같이 성대하며 11월 제4목요일에 행한다. 이와 유사한 풍습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고구려 때 동맹(東盟)이라 하여, 10월에 전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의 선조인 주몽신(朱蒙神)과 그의 생모 하백녀(河伯女)를 제사하고, 풍성한 수확을 주신 천신에게 감사하는 농제(農祭)를 올렸다고 중국 《위지(魏志)》의 <동이전(東夷傳)>에 전한다. 이러한 의식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영고(迎鼓), 동예(東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는 제천의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추수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한 음력 8월 보름의 한가위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어서 차례(茶禮)를 올리는 풍습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또한 메이 플라워호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620년 영국 뉴잉글랜드 최초의 이민(移民)인 청교도(102명의 필그림 파더스, 즉 巡禮始祖)를 북아메리카로 수송한 선박.
무게 180t, 길이 27.5m, 돛 3개를 가진 배로,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商船)이었다.
1620년 8월 15일 사우샘프턴을 출항했으나, 같이 출항했던 스피드웰호가 누수(漏水) 고장을 일으켜 다시 돌아와, 같은 해 9월 16일 단독으로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였다. 11월 19일에 케이프코드만(灣)을 경유하여 11월 21일 오늘날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여 선박수리와 보급(補給)을 받은 후, 12월 21일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을 플리머스로 명명하였다. 이 선박은 이듬해 봄까지 플리머스항에 정박했다가 4월 5일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위에서 말하는 메이 플라워호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탑승하고 있었고, 그들이 미국에 정착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어 결실한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림으로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추수감사절에 대한 역사는 미국 내에서도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지금의 절기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의하여 최종 결정되어진 것이며, 이 날을 온 국민의 축제일이자 국경일로 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다는 기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추수감사절" 자체보다는 이것이 과연 교회 안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므로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참조 자료들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인들의 축제인 추수감사절
한국에서도 국민적인 축제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날, 추석 등과 같은 날로서 명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날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면 불신자이든지 막론하고 가족들끼리 모여서 함께 즐겁고 기쁜 시간들을 나눕니다. 그 날만큼은 반드시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온 지역에서 교통 정체 현상들이 벌어져서 우리는 "귀성전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날을 명절로 지키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축제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립기념일, 성탄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들은 독립 기념일이 되면 국가적으로 거대한 행사를 준비하며, 성탄절이 되면 한달 전부터 준비하여 가족들과의 만남을 시도하고, 추수감사절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서 터키(칠면조)를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미국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을 지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몇 해 전 겨울에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선교사님의 초청으로 그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성경대로 믿고 실천하는 분이었고, 미국 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파송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집안에 크리스마스 트리로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추수 감사절이 되면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터키(칠면조)고기를 놓고 축제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외국에 머물면서 설날이나 추석을 맞게 된다면 떡국이나 송편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 쌀을 구하러 다닐 것이고, 또한 흩어져 있는 가족들과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인들의 문화라는 사실에 대하여 저는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과 더불어 들어 온 누룩
사실상 추수감사절은 한국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 날을 부활절, 성탄절과 더불어 가장 큰 축제일로 지킵니다. 이러한 모습은 미국을 제외한 어떠한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수용했을까요?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복음이 주로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많은 교회를 세웠고, 또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땅에 이토록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게 된 것도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 땅에 심기 시작했고, 더욱이 그 문화의 진원지를 교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인들에 대하여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닙니다. 물론 저에게는 매우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미국인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소 불만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본래 미국 땅은 인디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개척해 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방해꾼들이나 다름없는 원주민(인디언)들을 사정없이 총으로 쏴 죽이고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그리고는 미국 전역을 차지한 그들은 이제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미국의 힘이 세계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복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 많은 누룩들을 섞어서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누룩들로 인하여 교회는 완전히 부패되어지기 일보 직전의 순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추수 감사절에 대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생각을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헌금하는 날"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은 한국 교회 내에서 헌금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한국 교회에는 미국인들이 목회하는 교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일년 중 가장 많은 헌금이 들어오는 날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은 한국 교회를 부패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않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기복신앙의 열매
그렇다면 어떻게 추수감사절은 이처럼 쉽게 한국 땅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요? 물론 미국인들에 의해 복음이 들어왔고, 또한 그들의 문화를 이 땅에 심는 데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상 그 주된 원인을 기복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이처럼 엄청난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기초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이 드릴수록 많은 복을 받는다"는 생각과 가르침은 초창기부터 교회가 가르쳐 온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1년중 한 날을 정해서 드릴 필요가 있었고, 가장 적합한 날이 바로 추수 감사절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11월 4째주 정도가 되면 대부분의 농사일이 마무리되고 수확을 거두어 결산하기가 좋은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농사의 일을 하는 자들은 자연의 도움이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음 해에 풍성한 농사를 기원하는 의미에서도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기해서 예물을 드림으로서 그들 스스로 위로를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운영과도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교회는 이 절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날의 걷혀진 헌금과 헌물로 1년동안 교회를 운영해야 했고, 기복신앙에 바탕한 성도들의 헌금과 헌물은 자연스럽게 이 절기에 맞춰서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기로서의 추수감사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갈라디아서4:9-11)
바울은 복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다시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절기를 지키는 것을 가리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만일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분이라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마도 더욱 놀라서 저주에 가까운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도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절기를 교회가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미국인들에게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만 그 넓은 미국 땅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날을 기억하라는 말조차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성경이 기록된지 약15세기가 지나서야 있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순교 당한 수 천만명의 사람들을 기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휴일을 제공하고, 모여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들을 기억하며, 일년 중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절기인데 반하여,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기념하여 절기로 삼은 것은 명백한 누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날들을 절기로서 받아들이고 지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복음을 처한 것으로 만드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18)
우리는 위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게되면 종종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들을 봅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하지 말아야 합니까?"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이러한 자들이 있다면 저는 그가 결코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자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많이 "감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약231회).
그 감사는 결코 우리가 좋은 일만 일어날 때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조건도, 약속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만 어느 때, 무슨 일에든지 감사하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렇게 감사를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즉시 실족하여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들 것이며, 또한 우리를 달콤하게 만드는 것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장차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주어질 보상으로 인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절기로서의 감사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하고, 기억될만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교회에서 감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부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들어 온 누룩에 속지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된 감사와 안식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