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조회 수 2807 추천 수 0 2010.06.05 14:55:39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고린도전서1:23,24)

우리가 십자가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칫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오해를 살만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이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절반 이상은 분명히 혹시 이단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너무도 십자가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잘 못 이해한다면 분명히 그의 신앙도 위협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잘 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부디 이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에 대한 건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 온 십자가

우리는 어디를 가도 다양한 십자가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거리에서 높은 종탑 위에 세워져 있는 붉은 십자가의 모습들과 사람들의 몸에 걸려있는 귀걸이, 목걸이 등에서 십자가의 형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친밀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십자가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형상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당이 세워지면 당연히 십자가를 높이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이라는 표시로 만들어진 집 문에 붙여진 교패마다 어떠한 형태이든 십자가의 모양이 교회의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들여다보면 많은 십자가 모양의 그림과 장식품들이 이곳 저곳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큰 믿음 위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교회가 십자가를 경히 여기면 혹시 이단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만큼 친밀하게 다가와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제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에나 사용하고 있는 십자가

그러나 우리가 이 십자가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 십자가가 결코 기독교회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그리스도인들을 무수히 죽이고 핍박했던 카톨릭 교회는 오히려 더욱 아름다운 십자가 문양을 그들의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십자가 모양을 변형시킨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교의 사제 복장에서도 십자가 모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모양이 어느 종교에서나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제로 고대 바벨론으로부터 시작된 종교가 십자가 모양을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니므롯과 세미라미스의 아들이었던 탐무즈(Tamus)의 이름 맨 앞글자인 'T'로부터 시작된 형상은 앵크 십자가와 그 외 다양한 모양의 십자가로 변형을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다양한 십자가의 모양들을 가진 종교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가 결코 기독교의 상징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것이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어떠한 형상도 만들어서는 않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형상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출애굽기20:4-6)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도 가지지 말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결코 어떠한 형상을 만드신 적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떠한 형상들을 만들고 그것을 상징으로 삼고 있다면 이것은 오히려 복음을 종교로 바꾸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형상을 가지고 그것을 숭배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경로들을 통하여 십자가를 우상화하려는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가령 과거에 드라큘라와 같은 영화는 악한 영들은 십자가 형상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그려 넣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믿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특별한 의미와 능력을 가진 형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는 교회 안에 들어 온 심각한 누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 숭배자들과 십자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탄 숭배자들은 날개 달린 천사의 모습에 가슴에 십자가를 새겨 넣고 그것을 숭배합니다. 또한 의식을 진행하는 제사장의 복장도 가슴에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음으로서 경배의식을 취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십자가를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십자가는 신비주의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종교에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모든 종교가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십자가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다른 종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가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십자가 그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오직 말씀만이 그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씩 방송을 통해서 록(rock)음악을 하는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을 자세히 보게 된다면 그들에게는 언제나 십자가 모양의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고 때로는 문신을 새긴 상태에서 노래를 합니다. 그들의 내용을 들어보면 대부분 기독교를 증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때로는 사탄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는 자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붙인 그들의 귀와 목, 그리고 몸에 간직한 채 저렇게 노래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해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오래 전부터 십자가는 사탄 숭배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악령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나치 독일의 상징이었던 변형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자료들을 통하여 히틀러가 카톨릭 교인이었으며, 그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통합하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 카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당시 새시대 운동의 상징이었던 크로바 꽃잎 모양의 네잎사귀 십자가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도 사용되는 신비주의 상징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앞세워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학살시켰고, 승승장구하며 유럽을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영국과 연합군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콘스탄틴 황제가 환상 중에 보았다는 십자가 모양을 군인들의 방패마다 붙이도록 함으로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카톨릭 교회는 십자가가 이처럼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지금 모든 기독교회들에 심어 놓고 있습니다.

카톨릭교회가 심어놓은 누룩인 십자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형상을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던 루터 이후 많은 카톨릭 사제들이 카톨릭에서 나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기독교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결국 위기를 맞게 되었고, 각 국가별로 완전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기독교 국가로 바뀌어져 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숨어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하로부터 나와서 교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교회는 새로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성경의 기준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들은 각종 의식과 형상들은 그대로 둠으로서 십자가를 포함한 각종 사악한 교리들을 담은 것들이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악한 교리를 담은 형상과 의식들을 행하지 않는 교회들을 이단으로 몰아넣는 현상들을 봅니다. 사실상 지금도 많은 교회들은 십자가를 세우지 않거나, 사도신경을 하지 않거나, 세례가 아닌 침례를 행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단이라고 정죄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가운데 십자가는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복음적인 교회가 많이 있다는 미국에서조차도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해야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미국의 교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교회들이 이러한 미국의 모습들을 보면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교회들의 대부분이 카톨릭 교회의 영향권 아래 있는 유럽의 교회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전통과 의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카톨릭과 전혀 다르지 않는 형태를 가진 채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카톨릭 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더욱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상태가 계속된다면 오랫동안 십자가를 그들의 형상으로 삼아왔던 카톨릭과 전혀 다르지 않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

어떤 전도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cross)를 나무기둥(stauros)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음적인 전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달리신 나무 기둥이 십자가 모양이었다는 점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십자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관련하여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셨으니 이는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3:13)

바울은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하여 의아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짖지 않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나무(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자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매우 심각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 둔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었던 기도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이러한 것입니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29)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죽음을 겁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은 이보다도 더욱 큰 위협을 얼마든지 받으셨고, 자신의 입으로 친히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이토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칼집에 꽂으라 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18:11)

예수님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칼을 쓴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하면서 내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함으로서 아직 잔을 마시지 않았음을 암시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잔은 언제 마시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때에 어떠한 모습을 하고 계셨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잔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5:21)

예수님께서는 잔을 마셨습니다. 이 잔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담은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완전히 죄의 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의 몸을 외면하실 것이 두려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겟세마네에서도 있었지만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시면서도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을 버리지 말 것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지 말 것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인류의 죄들을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아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의 잔을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마신 몸을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음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와 허물들을 대신 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가가 결코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을 못박은 곳입니다. 물론 그 일로 인하여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해지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날까지 신비주의 종교들과 저주의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스럽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죽인 십자가 형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십자가 형상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정작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는 매우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우리가 과거의 오랜 편견들을 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삶을 더욱 견고하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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