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모든 것을 그분의 발 아래 두시고 그분을 교회에게 주사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에베소서1:22-23)
저의 친척 중의 한 분이 언제나 저를 만나면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교회에 손님 많이 늘었냐?" 저는 이러한 인사를 받을 때마다 질색을 하면서 "교회는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하고 만날 때마다 변명을 해 보지만 그분은 매번 똑같은 인사로 저를 대합니다. 문제는 그분이 그 말을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눈으로 보여 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교회를 하나의 영업을 하는 곳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은 이미 사업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의적인 것도, 기본적인 원칙도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치열하게 경쟁할 뿐입니다. 일반적인 원리가 그러하듯이 남이 잘되면 내가 도태되고 남이 안되면 내가 잘된다는 계산이 교회 안에서도 깔려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는 경쟁 체제를 갖추어서 치열한 다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장 지향적인 교회들
사울이 그의 죽음에 동의하더라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있어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지역으로 널리 흩어지니라(사도행전8:1)
우리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지속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의 구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신들의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만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결코 그들이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향하기를 원하셨고,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흩어졌고, 많은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성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더욱 많은 이들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해 내도록 증거 하는 삶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잘 알고 있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한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 바로 다음 지역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자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원대한 꿈을 펼치지도 않았고, 거대한 교회당을 지은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했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결박과 고난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곳을 찾아 복음을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각 도시에서 증언하사 결박과 고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런 일들이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사도행전20:23-24)
그러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의 복음을 맡은 자들이 바울과 같이 결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자리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시들을 찾아 증거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세대는 이미 이러한 일들에는 너무도 무감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자신이 목회를 하고 있는 교회가 하루라도 빨리 안정이 되기를 고대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생활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회는 세상보다 더욱 부도덕한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일단 그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든 과거는 용서를 해 주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조리를 저지르고, 거짓말을 일삼더라도 일단 부와 명예, 권세를 가지게 되면 과거의 일들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속성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단 힘이 생기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들이 교회 안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무리 이단적이고 비진리를 가르친다 할지라도 일단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서로 타협하고 면죄부를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일에 앞장 선 것이 언론임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권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각종 기독교 관련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방송국들은 그들을 후원자로 이끌어 내기 위해 변호해 주고 광고해 주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히 이러한 언론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분별할 겨를도 없이 그들에게 대하여 아무런 의심 없이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들은 모든 교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최소한 제가 알기로는 지금의 목사들이 주님의 사역을 하겠노라고 신학교에 입학을 할 때는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일을 온전히 하겠다는 각오로 공부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각오는 "아골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신학공부를 마치고 나면 이러한 생각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곳 저곳 이력서를 제출하며 사역할 곳을 찾아야 하며, 보다 나은 조건을 찾아서 거취를 결정하는 직업으로서의 목회를 생각하는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느덧 교회는 사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교회는 매우 매력적인 고객이자 영업장입니다. 대형교회의 경우 매주 수 억 원의 헌금을 소비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년 치열하게 교회에 로비를 하고 입찰을 합니다. 이것이 복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교회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들은 가장 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수십억 원에 이르는 건물을 부숴야만 하는 현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있는 목회자는 더 이상 주님의 종이 아닌 한 거대한 기업의 관리자로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이러한 성장 지향적인 교회들로 인해 교회관이 무너져
성장지향적인 교회가 낳은 열매들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은 이단 종교들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도 이단종교들이 있지만 아마도 기독교와 관련된 이단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는 "종교의 자유"가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보지만 사실상 더욱 큰 원인은 성장 지향적인 사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위협하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교회가 성장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모두 받아들이고 비성경적인 것일지라도 일시적으로나마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면 적용을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들은 많은 이단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선포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
디아서1:9)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교회의 소유가 주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교회를 빼앗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지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을 그들의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전통과 유전이 성경 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단을 정죄함에 있어서도 더 이상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조차도 이미 성경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나친 성장지향적인 사고로 인해 자신들의 교회를 말씀으로 비쳐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미 커버린 상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까닭에 누구도 다른 복음, 거짓 진리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이상적이고 성경적인 교회는 지역교회(Local church)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대로의 교리와 믿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운영에 있어서 자치적이어야 합니다. 어느 다른 교회로부터 간섭 받지 않으며, 강요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철저히 고립된 교회의 모습을 가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 교제는 결코 정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을 구성해 가는데 있어서 서로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들여다보면 많은 교회들이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보다 영향력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몸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정치 세력화를 시도했고, 교회는 언제나 정치의 시녀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대형교회들일수록 작게는 교회정치, 크게는 정부와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교회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이 있다면
그렇다면 성장 지향적인 사고로 인하여 허점을 보인 기독교회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따라 모든 교회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작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교리도 버리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교회의 전통도 버리고 다시 성경을 중심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서 정치세력화 했던 모든 것들을 폐하고, 오직 성경을 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는 것이 오늘 날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들만의 가르침을 가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록 행정과 운영에 있어서 다른 이들로부터 간섭은 받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교회가 성경을 기초로 서 있는가를 지속적으로 확인해 가기 위해서 교제도 지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회들은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협력해서 사역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때로 우리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부분 독선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두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교회주의가 가지는 위험성은 바로 그들을 더욱 명분이 있게 만들어 준다는데 있습니다. 건전한 복음을 가진 교회들이 교제를 지속해 가는 것은 바른 복음의 기초를 세워 가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그 소유를 주장할 아무런 명분도 성경을 통해서 찾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만이 주님의 교회이고, 다른 교회는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 오직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