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에 한 말들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마지막 때에는 자기들의 경건치 아니한 정욕대로 걷는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알려 주었는데 이들은 자기를 분리시키는 자들이며 육체적 감각대로 살고 성령이 없는 자들이니라. (유1:17~19)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삶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망설임 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다서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에 한 말들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여 말한 것도 바로 이 원리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과 같이 제대로 정리된 상태에서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한 말들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힘썼습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지막 때인 오늘날 경건치 아니한 자들 가운데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요? 물론 그들은 정욕대로 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경건의 댓가가 그토록 참담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늘날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자기를 분리시키는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분리는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마귀의 활동 영역 속에 있는 세상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경건한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치 않은 자는 세상이 아닌 주님의 교회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려 합니다. 그리고 같은 믿음의 형제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 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파괴자들이요, 비판자요, 혼란케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철저히 마귀의 일을 대신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교회가 한 몸으로 모든 성도들은 그 지체가 되고 있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육체적 감각, 즉 육신의 정욕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신실한 사람인 것처럼 가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으니 어떻게 살아도 결코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자랑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맞는 것 같지만 그러한 생각들은 결코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치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하여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성령이 마치 사람을 술에 취한 사람처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만들어 내며, 또한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은 결코 사람들에게 신비스런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매우 위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곧 거룩한 영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의미는 곧 우리의 삶을 경건함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심을 믿고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그는 더 이상 성령님이 함께 하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불경건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