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적(27) 수종병(dropsy)이 있는 어떤 남자(눅14:1-6)
안식일에 그분께서 빵을 잡수시러 우두머리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들이 그분을 지켜보더라. 보라, 그분 앞에 수종이 있는 어떤 남자가 있더라.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분께서 그를 데려다가 고쳐서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있는데 그것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에 그것을 곧 끌어내지 아니하겠느냐? 하신즉 그들이 이것들에 대하여 다시 그분께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14:1~6)
수종병(dropsy)은 신체의 조직 간격이나 체강(體腔) 안에 림프액, 장액(漿液) 따위가 많이 괴어 있어 몸이 붓는 병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이 그러하듯이 심해졌을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환자를 만나게 되는 장소가 공교롭게도 우두머리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빵을 잡수시기 위해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방문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과 예수님 앞에 수종병이 든 한 사람난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수종병 환자가 예수님의 방문을 알고 미리 방문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미리 데려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응답하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마도 바리새인에 의해서 수병병 환자가 온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앞에 병든 몸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병든 자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그도 역시 예수님을 통해 병이 낫기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우두머리 바리새인 앞에서 대단한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매우 긴장된 모습으로 자신에게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기존의 율법주의자들이 고수하고 있었던 생각에 대하여 고정관념들을 버릴 것을 요구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후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복음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복음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즉 이 수종병이 든 사람은 율법과 복음 앞에서 문제의 해결을 구하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적 행위와 주님의 은혜를 두고 어떠한 방법을 따를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정관념으로는 병을 고치는 것을 포함한 어떠한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병을 고치는 문제를 앞에 두고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 된다고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병을 고치지 말도록 정한 것은 스스로 만든 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됩니다. 그 까닭에 자칫 안식일과 같이 거룩한 날에 환자를 잘 못 다루다가 시체를 만지게 되면 엄청난 범죄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전통적인 규례에 따라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들에게 쉬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서 안식일은 매우 강제적인 조항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범하는 자에 대하여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출35:2). 그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이 쉬는 의미보다는 단순히 율법의 한 부분을 실행하는 날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셨던 것은 자녀들이나, 종들, 그리고 가축들을 위한 배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신5:14). 왜냐하면 안식일의 강제 조항이 없다면 주인은 자녀들이나 종들, 그리고 가축들을 혹사시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법이 왜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양심을 따라 살도록 만들면 되는데, 법을 통해서 규제하고, 통제합니다. 그 이유는 약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법이 없다면 힘 있는 자들은 약한 자들을 마음껏 다루고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정하고, 그 법 아래서 약한 자들을 보호하도록 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강한 자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약한 자들이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게 된다면 강한 자들은 마음 놓고 자신의 일들을 계획하며 추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의 불만이 많아지고, 혹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언젠가 그들의 주인을 배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은 다만 율법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들에게 휴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수종병 환자를 앞에 두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그들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안식일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자유함을 얻는, 즉 휴식을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종병 환자를 고쳐서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있는데 그것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에 그것을 곧 끌어내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상 그들에 대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안식일에 환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재산에 손실이 오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안식일을 잊고 행동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상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활 속에서는 바르게 실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위선자들로 표현합니다(마23:13-14). 그들은 안식일을 대함에 있어서도 매우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은밀하게 율법을 범하는 이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회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는 매우 거룩한 성도로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결코 경건하지고 않고, 세상과도 분리되지 않은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밥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책망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위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보여 지게 될 모습입니다(롬14:10,고후5:10).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위선적인 삶에 대하여 반드시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루하루를 경건하고, 보다 정직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