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교회가 황금기를 지나는 동안 개신 교회는 선교에 관해서만큼은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초기 종교 개혁자들의 주님의 지상 명령에 대한 해석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국한하고 있었다는 것과, 당시 로마 가톨릭에 비하여 숫적으로 상당히 열세에 놓여 있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급급하고 있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국가들이 지리적으로도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와 같이 고립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정보력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선교지에 대하여 접촉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의 예수회와 같은 효과적인 선교조직을 갖지 못한 것도 선교를 하는데는 매우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개신교회가 모두 선교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할레 대학 출신들의 선교 활동 참여와 모라비아 교도들의 선교활동은 침체 기간 중에도 매우 돋보이는 선교조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트 프랑케(1663-1727)에 의해서 1694년에 시작되어진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이후로 영성을 중시하는 그들에 의해 이교지역에 있는 복음 없는 자들에 대하여 부담을 가지고 후에는 데니쉬 할레 선교부를 형성하여 그곳으로부터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할레대학으로부터 파생되어져 나온 또 하나의 선교집단으로 진젠돌프 백작이 이끄는 모리비안 교도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후에 윌리엄 케리의 선교와 웨슬레 부흥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윌리엄 케리는 근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고도 불릴 정도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근대 선교에 없어서는 안 될 선교사가 된 것은 단순히 헌신적인 사역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의 편견을 깨고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선교를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었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의 칼빈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선교에 있어서 침체기를 걷고 있었던 교회에 “이교도의 회심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하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한 질문”이라는 책을 통하여 선교신학의 방향을 잡아 주었고, 선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으며, 선교회를 구성하였고, 그의 사역의 방향을 성경번역과 보급활동에 공을 들임으로서 이후에 개신교 선교에 놀라운 부흥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 전략은 주로 설교와 현지어로 도니 성경의 번역과 보급, 교회 개척과 현지의 타종교에 대한 연구, 그리고 사역자를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선교 방법은 오늘날에도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선구자로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들자면 중국 내지에서 선교를 했었던 허드슨 테일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865년에 중국 내지 선교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전에 주로 선교단체에 의해서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테일러는 매우 혁신적인 물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선교비용을 기존의 교회나 단체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으로 공급받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방식으로 인해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더불어 오지와 내지에 더욱 깊은 곳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교회관의 혼란을 가져 온 것은 아쉬움을 주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토록 개신교회의 선교가 도약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서구 사회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이 비기독교권 국가를 식민지화 함으로서 기독교가 합법적으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선교사들의 신분과 안전이 보장된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즉 선교지 교회는 식민 정부의 보호 아래 유리한 상황에서 성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건전한 기독교의 문화뿐만이 아니라 식민적인 사고까지도 들여오게 됨으로서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입니다. 서구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저항으로 오히려 후에는 핍박의 대상이나, 기독교가 서구 사상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이 된 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이 더욱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기는 개신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부흥을 이루었던 때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