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현대인들에게 주인과 종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일반 직장에서 직급에 따라 구분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종들이 대부분 주인의 소유로 되어있고, 또한 종이 스스로 일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원하지 않으면 포기 할 수도 있고, 또한 노동조합과 같은 곳에 가입하여 집단적인 행동을 취하여 경영자에 대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노동조합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이 있지만 현대 사회가 성경을 기록했을 때와는 많이 변해 있고, 순수한 목적으로만 활용한다면 경영자의 횡포에 대하여 적절한 견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운영의 방법에 대한 것과 일하는 자세와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일하는 자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들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멍에 아래 있는 종들마다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1)로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주인이 믿지 않는 주인이었을 경우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기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6:5-7)고 권면합니다. 믿지 않는 주인에 대해서도 그리스도를 대하듯 하라는 권면은 결코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죄와의 타협을 요구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눈가림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할 것을 권면합니다. 즉 흉내를 내는 섬김이 아닌 진심으로 할 것을 간청합니다.
이러한 충성에 대하여 주인들의 모습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 대하여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고 권면합니다. 모든 주인들이 선하고 부드러운, 즉 친절한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까다롭고 종들에 대하여 함부로 대하는 종들이 더욱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된 종의 자세는 어떠한 주인을 만나든지 항상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모든 사회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상전이 선하든 악하든 언제나 복종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상전은 곧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로 장차 받을 보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주인에게 순종하며 존경받을 자로 여기도록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1)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주인들에게 순종하는 행위가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2: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주인이라도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충성스러운 요셉에 대하여 보디발도, 바로도 그를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한 종이었지만 그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그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왔지만 그의 충성스러운 모습은 바벨론의 왕뿐만이 아니라 이후로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왕의 곁에서 인정받았고 결국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를 통해서 결국에는 하나님이 돋보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주인에 대한 불순종은 오히려 모독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세대에나 악한 종들은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악한 모습들에 대하여 “거슬러 말하는 것”(말대꾸)과 “훔치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딛2:9-10). 말대꾸를 한다는 것은 곧 불순종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의 명령에 대한 불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훔치는 행위는 결코 용서가 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결국 주인으로부터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종들은 자신의 주인에 대하여 언제나 두려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무너지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모든 자들이 평등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이는 주인과 종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초대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이 결코 주인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2)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인들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종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그 결과에 따라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종은 얼마나 주인에게 복종하였는가, 또한 주인은 자신의 가진 것들을 가지고 자신의 이웃들에 대하여 얼마나 유익을 끼쳤는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과 결과입니다.
종 된 자는 주인의 행동을 판단하고, 또한 그들에게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상전에 대하여 보다 정의로운 것들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폭력을 통하여, 때로는 총칼로 무장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먼저 복종하는 자세이며, 그 심판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물을 탈취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착취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빼앗을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비록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것일지라도 그것은 소유자의 권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많은 이들에게 갈등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이미 많은 악한 주인들로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사람들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심판의 권한은 더욱 없습니다. 종으로서 사는 자들은 오직 자신의 주인에 대하여 복종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그들의 주인을 존경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써 일하면 됩니다. 물론 그 복종과 기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출세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매우 위험한 것이지만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들의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탈취하는 행위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들의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세는 얼마가지 못하여 완전한 멸망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성을 만들고자 했던 바벨탑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도 그 엄청난 성을 짓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막으셨습니다. 심판은 우리가 내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정의에 대하여 관심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만 기도함으로 더 이상 그들이 이 땅에서 장성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충성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을 알고 성실한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