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에게(요삼1:1-2)

조회 수 3200 추천 수 0 2010.08.26 21:02:24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복사상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복신앙을 가르치는 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 바로 위의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의 바탕 위에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했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교회를 찾았고, 병 고침을 얻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지도자들은 더욱 큰 능력을 얻어 보겠다고 산으로 들어가 금식을 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자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은 자들도 많이 있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매우 헌신적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만을 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고, 병이 낫기를 바라며, 지도자들도 사람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부터 초대교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제자들을 통하여 드러난 기적이 복음 전도에 긍정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남으로서 복음이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인식을 가져다 준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한 능력과 기적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의 초기 사역이 아닌 후기 사역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해 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기적에 의존하며 사람들에게 능력을 보이려고 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지막은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병에 들어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침을 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감사를 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감옥에 갇히는 경험을 해야 했으며, 요한은 마지막에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는 처지에 놓였던 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면 그들은 기복신앙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실패한 전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들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기복신앙으로 가는 길은 결코 성경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권면의 말씀을 기록함으로서 성도들에게 피차 형통하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축복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잘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십시오. 성경의 권면은 먼저 영혼이 형통함에 따른 삶의 형통함과 건강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영혼이 형통한 삶, 즉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형통한 삶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어떤 자세로 형통한 삶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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