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서는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까닭에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에스더서를 정경으로 여겨야 하는지에 대하여 매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려 했던 하만과 그의 주변 사람들을 모두 학살하는데 그 숫자가 무려 7만 오천 명에 이릅니다. 그들의 잔인성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고국에 들어가 살도록 했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땅에 남아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인 수산에 에스더라는 여인이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고, 그의 삼촌이었던 모르드개와 더불어 유대인을 멸하고자 했던 계획을 알고 극적으로 막았던 일을 기록한 것이 에스더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달월 14,15일을 부림절로 지키는데, 그 날은 바로 에스더서에서 보여주었던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난 때를 기념한 날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림절의 의미를 되새겨주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을 보호해주신다는 확신을 갖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에스더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민족의 몰살을 막고, 혼자만이 아닌 희생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을 통하여 희생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의 목숨 하나만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험을 피하고,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수치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죽음 가운데 놓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희생의 사랑을 보이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즉 그분의 이름을 단 별명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이러한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잇어야만 합니다.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서 죽음의 위험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들의 죄를 사해주실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합니다(출32:32). 그것은 곧 자신은 불구덩이 속에 던져져도 좋으니 자신이 이끄는 이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를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희생의 사랑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라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는 나사르(나실)인으로 평생을 살아 온 자였지만 하나님의 구별된 자로서 칭찬받을만한 삶을 살지 못한 자입니다. 오히려 그는 수많은 범죄 속에서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온 자입니다. 어찌 보면 그에게 사사(재판관)라는 호칭을 붙여주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드온과 바락, 입다와 다윗, 그리고 사무엘과 이름을 같이 놓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습니다(피11:32). 그가 이처럼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몸을 던져 블레셋(팔레스타인)의 영주들과 백성들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삿16:30). 만일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비참하게 죽어갔다면 아마도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희생은 이스라엘을 살리고, 그의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의 전도는 매우 특별합니다. 그는 전도의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긴 자입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강도를 만나며, 유대인들로부터의 위혐과 굶주림, 그리고 추위에 헐벗음으로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고후11:23-27).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과정들을 극복하고 전도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행21:13). 그렇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에스더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임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초신자들에게 주님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주님의 존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 믿음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한 희생을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오랜 시간동안 영적침체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언제나 “나는 오늘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당장 주님을 위해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순간들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찾아옵니다. 그 순간 과연 우리는 기꺼이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 앞에 희생을 당하기도 하고, 비겁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까?